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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진정한 개혁 (학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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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개혁 (학 1:12-15)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이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에 의해 버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서 다시 회복하고,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현대교회가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과 너무도 닮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설교들이 강단에서 행해지고 있다. 
  
설교본문을 읽었지만, 본문과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아니다. 그들의 신념인 철학과 과학, 종교, 지식을 전달하는 강연이지, 설교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재해석해서 전달함이 설교다. 

또 부와 명예가 교회로 몰리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교회가 타락한 소식들이 자꾸 들린다.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교회를 장악했다. 우리는 이런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날마다 새롭게 개혁해야 한다. 끓는 물 안에 개구리를 넣으면, 즉시 살려고 튀어나온다. 

그러나 찬 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살고 있는 보리새우는, 허물을 벗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어릴 때는 허물이 부드러워서, 자주 허물을 벗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이 딱딱해져 벗는 기간이 길어진다. 그러다가 허물이 딱딱해져, 더 이상 벗지 못하면, 자신의 허물에 갇혀, 보리새우는 죽어간다. 교회는 솥 안의 개구리나, 보리새우가 되면 결코 안 된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늘 허물을 벋는, 개혁 신앙이 되어야 한다. 

구원파는 구원받은 사람들은, 회개할 수 없다고 한다. 구원받은 사람이 회개하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 구원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말장난이다. 비행기와 배도 그 방향을 향해 갈 때, 끊임없이 조금씩 방향을 수정하면서 간다. 
개혁은 다시(re) 그 모습(form)으로, 돌아감(reform)을 뜻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환원운동이었다. 초대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되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었다. 조금이라도 틀어졌으면,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한다. 한문으로 개혁(改革)은 ‘가죽을 고친다.’는 뜻이다. 

본래 가죽은 그대로 사용하면, 뻣뻣하게 되어, 변질과 변형되어, 못 쓰게 된다. 따라서 약품처리를 하여 성질을 고쳐야 한다. 개혁의 개(改)자에는, 자기를 뜻하는 ‘몸 기(己)’자가 들어 있다. 이는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치라는 의미다. 그래서 개혁과, 혁명은 다르다. 
혁명은 무력으로 변화를 이루어낸다. 혁명은 밖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개혁은 설득하고 감동시켜,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변화를 이루어 낸다. 개혁은 안으로부터 시작된다.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 따라서 개혁은 나부터 시작되고,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너부터의 혁명과 밖으로부터의 혁명은, 구호는 요란하지만, 성공할 수 없다. 개혁은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내가 변해야만 가정이 변하고, 내가 변해야 교회가 변하고, 내가 변해야 이 세상이 변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변화될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12). -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학개서는 포로에서 귀한한 자들을 격려하며, 성전건축을 완공하게 한 책이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전은 그대로 둔 채, 먹고 사는 문제에만 신경 썼다. 성전건축의 신약적인 의미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데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선지자 학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에 2가지로 반응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2) 하나님을 경외했다. 이 2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하고서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나란히 기술했다. 선지자 학개가 선포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그들은 선지자 학개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선지자 학개가 선포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었나? 학개 선지자가 천사의 입을 가지고, 말씀을 설득력 있게, 잘 전했기 때문인가?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너무 재미있고, 세상살이에 유익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했다. 하나님이 학개를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 복이 임하고, 살길이 열렸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나? 
역대하 결론부분인 (대하36:16-17)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비웃고, 멸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인간의 말로 들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법이 서로 싸운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선포하는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라.” 그러나 육신의 법은 “자기야 목사니까 저렇게 말하지, 어쩌면 우리 형편도 모르고, 저렇게 시대에 동떨어진 설교를 할까?” 그리고 귀를 막게 만든다. 누구 말을 따라야 할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육신의 법을 이기도록 만들 수 있나? 하나님의 법에, 더 많은 권위를 두면 된다. “그래 맞아.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한 말씀이니까, 내가 듣기에 힘들고 지키기에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절대적으로 순종해야지.” 그러면 살길이 열린다.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는지 설명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했지만, 그들은 판벽한(벽을 판자로 댄 좋은) 집에 거했다(4).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라고 했다(2).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방치해 두면서도, 자기들의 집을 짓고, 꾸미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 한재가 들었다(11). 한재(ב󰙠󰖓, 가뭄, 황폐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기에, 그들도 한재를 당해, 황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을 통해, 자기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다.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가?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펴볼지니라.”라는 말이다. 무엇으로 우리를 살펴보아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 행위가 잘못되었으면, 회개하고 돌아감이 바로 개혁이다. 이 시간 우리 
의 행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하다. 우리 성도들이 이루는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 그런데도 우리들 자신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지 않는가? 
성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서, 우리는 각기 육신의 일에만, 힘쓰지 않는가? 마음가짐의 변화, 삶 
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중심 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돌이켜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혁이다. 이런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13). - 오직 믿음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아니 이트켐,  I am with you.) 곧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학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에 좋도록, 자기 생각을 말 것이 아니다. 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삶의 모든 두려운 생각들을, 극복할 수 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못된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면, 그들을 붙들어주고, 그들을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롬8:31下)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면, 그들을 대적하면서,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모든 못된 무리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욕되고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면,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큰 복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힘들지 않고, 쉽게 그 일을 해 낼 수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 범사에 형통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외하면, 임마누엘의 복이 있게 된다. 삶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할 수 있다. 종교개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마르틴 루터다. 종교개혁을 할 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다 포기하고 싶었다. 

루터는 천주교 신부들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히려 그것 때문에, 추잡한 행동을 하는 것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럴 바에는 결혼해서, 건전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루터는 결혼했는데,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낙심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루터 앞에 나타났다. 루터는 깜짝 놀라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왜 상복으로 갈아입었소?” 그러자 아내는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예,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 

루터는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아니,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요?” 그러자 루터의 아내는 “당신 말대로 하나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어떻게 이토록 낙심에 빠져 있을 수 있나요?” 
마르틴 루터는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 신앙을 바로 잡고, 신앙고백적인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 그것이 585장이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루터는 힘들 때마다, 이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었다. 말씀대로 살아가기가 힘든가?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런 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해야 한다(14). - 오직 은혜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과 함께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를 받고, 뜨거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역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2下)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그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환경은 바뀌지 않았고, 여건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약속을 믿고서, 담대하게 일어나서,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그때가 언제였나?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초로 말씀을 주신 때가 언제였나? (1上)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한 지, 약3주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즉시 함께 일어나, 성전건축의 역사를 시작했다. 그 3주 동안 그들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도구나 연장과, 재료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또 누구는 무슨 일을 하고, 누구는 무슨 일을 하는 등의,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유대인들의 월력으로 6월은, 우리의 월력으로는 9월에 해당한다. 추수를 앞두고 있기에, 육신적으로는 매우 바쁠 때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육신의 일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일,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삶의 최우선을 두었다. 이렇듯 그들에게는, 마음가짐의 변화가 있었다. 삶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의 의미이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나? 돈을 많이 벌어, 부자 되어 잘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나?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원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건축의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시간 우리 모습을, 살펴보기 바란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지는 않는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고,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통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자. 오늘도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약속을 믿고, 우리 모두가 마음과 뜻을 같이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이루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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