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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백과 권세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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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과 권세 (마 16:13-20)

베드로가 고백한 장소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름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이고, 다른 하나는 헤롯 대왕의 아들 중 한 명으로써, 갈릴리 주변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빌립입니다. 

이곳은 유대 땅이지만 이방인의 문화가 깊이 새겨진 곳이었습니다. 우상 숭배가 가장 만연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Opinion vs. Truth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견해(opinion)에 관해서 물으셨습니다. 오피니언이라는 것은 참 다양합니다. 더러는 뭐라고, 더러는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할까요? 그들의 오피니언은 무엇입니까? 
  
오피니언은 주관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피니언은 진리와는 다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만 오피니언은 오피니언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는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참 좋은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글들 중에는 욕과 비방의 글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피니언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이것은 진리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주님이라는 단어 Kyrios는 성경 전반에 걸쳐서 많이 사용됩니다. 신약성경에만 740번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징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반영한 70인역(Septuagint)에서는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여호와(YHWH)라는 말을 마주할 때마다 대신 부른 주님이라는 아도나이(Adonai)의 번역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저 예수님을 높이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삶의 주인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오피니언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궁금해하실 뿐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의 관심은 고백입니다. 정말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대답을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견해가 아닌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백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백에는 자신이 담겨 있습니다. 영혼이 담겨 있습니다. 고백은 진리입니다. 반면에 오피니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경험으로 예수님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혹은 바라는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지”(who I am)에 관해서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 고백 위에 세운 교회의 권세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후에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는 당시에 이름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종의 별명입니다. 헬라어로는 베드로(페트로스) 아람어 게바(케바스)는 모두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전통은 이 본문을 교황의 권위에 대한 근거로 해석합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성에 대한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그 기초 위에 교회가 세워짐을 뜻합니다. 
  
반면에 개신교 전통은 반석이라는 말을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의 고백이라고 해석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토목 공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면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든든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고백에는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권세라는 말의 원어 “엑스우시아exousia”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ex”는 “무엇으로부터”라는 뜻이며, “ousia”는 “본질essence”을 뜻합니다. 그래서 권세라는 말은 “본질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란 어떤 본질적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권세란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서 시작됩니다. 교회의 권세는 본질적인 것, 즉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든든하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음부의 권세라는 말은 원어에는 “음부의 문들gates of Hade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음부란 구약성경에서는 세올(Sheo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든 죽은 사람들은 일단 이곳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음부에는 두 개의 문이 있으며, 메시야가 올 때까지 그 문들은 굳게 닫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기독교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음부의 문들이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 문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생명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 열쇠를 교회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막힌 문들을 여는 열쇠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교회는 그 열쇠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 열쇠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지옥의 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천국 열쇠입니다. 

그런데 이 열쇠는 천국 열쇠일 뿐만 아니라 땅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즉 사후의 세계뿐만 아니라, 이 땅의 삶에서 놀라운 권세를 주는 열쇠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복음의 능력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평안, 약속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는 삶이 보장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생기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내 삶의 문제로 씨름할 때에 우리는 부단히 내가 주인(주님)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처절한 현실 앞에 놓이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인생 하루를 늘릴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키 한 자를 늘릴 수 없습니다. 염려하고 걱정해보아도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질 따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더욱 귀에 와 닿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만큼 보장된 삶도 없습니다. 이 고백만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없습니다. 이 열쇠는 음부의 문들을 굳게 닫는 열쇠입니다. 하지만 이 땅과 천국의 문들을 여는 열쇠입니다. 

  
󰊳 메시야 비밀 사상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 구절이 따라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왜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요? 이것을 일컬어 메시야 비밀 사상이라고 합니다(마16: 20). 함구령의 이유는 “인기주의populism”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의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기적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치적인 권세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4:26-27)
  
예수님의 사역은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세상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방식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씨앗이 자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떡을 얻어먹어서가 아니라, 병이 나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그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일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세계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소수의 사람만이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님의 씨뿌리기 운동 방식을 선택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가 메시아라는 비밀을 알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한 사람의 고백에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설교를 듣던 삼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땅에서 만난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죽이던 바울이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들고 로마까지 나아갔고 유럽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유럽을 넘어서 아프리카로, 신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 땅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예언한대로 열방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을 가장 멋지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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