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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생명수의 강 (겔 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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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의 강 (겔 47:1-12)

여러분, 이스라엘의 <사해>를 잘 아시지요? 사해는 남북으로 80킬로, 동서로 18킬로에 달하는 바다입니다. 사해는 해수면보다 수백 미터나 낮은데,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해수면보다 390미터 정도 낮았지만, 최근 들어 흘러들어오는 물은 적고, 증발되는 물은 많아 2008년에는 해수면보다 421미터까지 낮아졌습니다. 현재 사해의 염도는 33.7%정도로서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이 살기 힘든 것이 어찌 사해뿐이겠습니까? 우리네 세상도 별로 사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명한 <청마 유치환선생님>의 <생명의 서>란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나’와 대면(對面)하게 될지니. 
하여‘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병든 나무처럼 부대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려고 많은 노력을 해 봅니다. 그러나 지식도 그를 구하지 못하고, 애증의 짐을 다 질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점점 깊은 고통에 빠집니다. 그래서 아라비아의 뜨거운 사막에 가서 해결책을 발견해 보려고 하지만, 거기에도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 곳에는 고민하는 알라신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고독한 사막 한 복판에서도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면, 어느 모래 언덕에 백골이 되어 눕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시에는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함께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진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을 사모하지만 얻지 못하는 고통이 어찌 시인에게만 있었겠습니까?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첨단 지식도, 경험도, 좋은 환경도 참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네 세상은 마치 이스라엘의 사해와 같습니다. 생명을 주어야 할 곳들이 죽음의 구덩이가 되고 있습니다. 

가정들을 보십시오. 가정은 지치고 피고한 사람들이 새들이 둥지에서 쉬듯이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대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가가 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이혼율을 세계 2위요, 노인 자살률이 세계 1위이고, 청소년 가출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정 때문에 죽어갑니다. 

직장도 그렇습니다. 직장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살아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 생명의 힘이 발현되는 곳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의 좌절과 실패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밑바닥부터 죽음의 기운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침수되어 지붕까지 잠길 위기에 처한 집과 그 지붕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처럼 위태롭습니다. 세상은 죽음의 바다와 같고, 그 안에서 한 마리 물고기 같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생명이 약동하는 곳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란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소금물인 사해에 맑은 물을 공급하여 염도를 낮추는 것입니다. 맑은 물이 흘러 들어가면 염도가 떨어지면 죽음의 바다는 생명의 바다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사해 살리기 프로젝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고 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천 척을 척량한 후에 그 물은 발목에 차게 되었습니다. 천 척은 대략 530미터 정도입니다. 다시 천 척을 척량한 후에는 물이 무릎에 차게 되었고, 다시 천 척을 척량한 후에는 허리에 차더니, 다시 천 척을 척량한 후에는 물이 많아져서 헤엄쳐야 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어디로 흘러들어갔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라바>란 지명이 나오지요? 아라바는 이스라엘 중앙에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는 저지대를 말합니다.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른다>고 할 때 그 바다는 사해입니다. 신명기 3장 17절을 보면 <아라바 바다 곧 염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은 큰 강이 되어 흐르다가 죽음의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 물이 흘러들어간 후 죽음의 바다는 어떻게 될까요?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8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읍시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할렐루야!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수가 흘러들어가 짠 바다의 염도를 낮추고, 이제 바다는 생명의 바다가 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생명의 물인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살아 일어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강 좌우편에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랍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아멘.  여기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라고 했지요?

이 표현은 창세기 2장 9절의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라는 구절과 흡사합니다. 생명의 강이 흐름으로써 죽음의 구덩이가 에덴동산처럼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습니다. 10절을 보세요.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른 생명의 물로 인해 바다도 살고, 물고기도 살고, 나무도 살고, 사람도 삽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생명의 물이 흘러 살리는 환상>은 어떻게 적용되었을까요? 
우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유다 백성들과 무너진 예루살렘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사해같이 되었습니다. 성전도 무너지고, 성벽도 모두 헐렸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바사의 고레스왕은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고, 그 곳은 다시 사람들이 번성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마치 강 좌우편에 열린 과일을 먹듯이, 예루살렘에서 기쁨과 감사의 열매를 먹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생명의 물이 흐른 것입니다. 

저는 이 생명의 강물이 우리에게도 흘러넘치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이 생명 강수를 마시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 어떤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살게 되길 원합니다. 

지금 무엇이 우리를 죽게 합니까?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죄책감입니까? 당시 유다 백성들이 멸망하고 고통을 받은 이유도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우상 숭배와 음란과 사치, 방탕은 그들의 예루살렘이 죽음의 땅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수는 그들의 죄를 해결하고, 과거의 부끄러운 모든 죄악을 씻어주었고, 그들은 회복되었습니다. 

죄를 씻는 용서의 생명수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다시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본문의 생명수를 <사면의 물, 용서의 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어떤 교부는 <세례의 물>이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는 표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생명수는 결국 예수님의 보혈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흘려주신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깨끗이 씻어줍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는 다시는 죄악으로 인해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살인과 강도로 사형수가 된 사람들도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교도소가 생명의 자리가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와 씻고 죄책감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또 하나님의 생수는 힘들고 고단한 삶 때문에 살 힘을 잃은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살이 때문에 자포자기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마실 물과 먹을 만나를 공급하시고, 질병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섯 남자와 차례로 살면서도 행복을 몰랐던 사마리아 여자는 그렇게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으로서 부귀와 지식과 명예를 가졌지만 생명의 기쁨을 모르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귀신과 온갖 질병과 장애로 고통 받던 이들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배고파 지친 이들이 배부름과 쉼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생명수를 통해 삶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눌러 죽게 하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강은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를 보면 마치 오늘 본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자랍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흘러넘칠 것이고, 장차는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져,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생명의 물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물이 어떻게 성전에서 흘러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거기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3장 5절을 보면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성전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생명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곳에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 힘으로 생명을 건질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해변에서부터 500마일 쯤 떨어진 대양 한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해 보세요. 한 사람은 올림픽 수영선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둘 중에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자신들의 힘으로는 둘 다 살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수영선수라도 500마일을 헤엄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명 헬기가 그들 위에 나타나 생명줄을 내려드렸다고 해 보세요. 자신의 수영 솜씨를 포기하고 생명줄을 잡아야 살 수 있습니다. 계속 수영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길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36편 8-9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아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렐루야!  

또 기억할 것은 이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성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수가 흘러나온 성전 역할을 하는 곳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교회를 사모하십시오. 특히 교회의 예배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이 자리에 무심하게 나오지 마십시오. 간절히 사모하면서 오십시오. 기도하면서 오십시오. 생명의 강수가 우리 각자의 영혼에 흘러넘치길 갈망하면서 나오시길 바랍니다. 예배하다가 영혼과 가정과 일터가 살아나는 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면,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님의 생명수를 얻을 것입니다. 

16세기의 유명한 영성가였던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 앞에서 낯선 사람처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같은 죽음의 세상 한 복판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내 주의 은혜 강가로>란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생명처럼 흐르는 강가에 나가는 마음으로 찬양하시고, 여러분 모두가 그 생명수를 얻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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