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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이 좋아 아름다운 야곱의 소천 (창 49: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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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아 아름다운 야곱의 소천 (창 49:29-33)

사람은 누구나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든지 노환으로 죽든지 한번 죽습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은 훈련이나 연습이 있어도 죽는 문제에 관한한 연습을 할 수 없으며, 시험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비록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했으나 만년에 평안히 일생을 마치는 야곱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해피 엔딩입니다. 그는 충분히 살았고 자녀들이 다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고 사는 것을 보았으며 12아들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한 후에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살아서 당대의 위대한 치적을 이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모습을 눈으로 보았고, 그 아들로 인하여 마지막을 평안히 살다가 죽게 되었으니 그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처럼 도처에 사고가 많고,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야곱의 최후를 통하여 교훈을 받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준비하였고 조금도 불안 해 하거나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그가 살만큼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불안 해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죽기 전에 12아들을 불러 그들의 미래를 위해 축복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먼저 "열조에게"라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조는 신앙의 열조입니다. 창세기 서두에 아벨을 비롯해서 에녹과 노아와 같은 신앙의 영웅들이며, 그의 조부 아브라함, 그의 아비 이삭이 모두 신앙의 열조들에 속합니다. 

야곱은 앞서간 신앙의 열조들이 가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땅에 있는 자녀들과 정든 이웃들과 떠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별이 슬픈 것 이상으로 지난 시대에 온갖 유혹과 시련을 이기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살다가 앞서 가신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끊임없는 만남의 사건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며, 친구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의 만남은 좋은 만남도 있으나 나쁜 만남이 많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서 가슴앓이를 하고,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일생을 계산해 보면 좋은 만남보다 후회스러운 만남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인생이 한 평생 살아도 좋은 일 보다 슬픔과 수고가 훨씬 많다고 하는 뜻으로 슬픔과 수고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혜의 마음으로 인생을 계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다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열조들뿐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방에 유리하며 환난과 핍박 중에 굴혈과 광야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로운 만남의 장이 열리는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공의 제한을 받으나 그 나라에서는 시공의 제한 없이 좋은 사람들, 신앙의 인물들, 참으로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악한 자와 불의한 자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불의한 자들과 만나서 고심했고 불신앙의 사람들과 만나서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다시는 고통스러운 만남이 없고, 행복한 만남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사 속에서만 듣던 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 성 프란시스, 성 베르나르, 마틴 루터, 요한 칼빈, 요한 웨슬리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수많은 성도들과 만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노사연씨의 노래 [만남]의 가사처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믿음으로 살 다가간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간다는 말을 음미해 보겠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나그네 길을 다 가고 나서 돌아 가야할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세상에 보내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그 생명이 소환됩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돌아갑니다. 

오늘날 죽음 후에 세상으로 다시 환생한다는 환생설이 동서양의 사상계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였습니다. 구약 창세기에는 아직 내세에 대한 확실한 계시가 없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식은 확실했습니다. 

그러니까 열조들이 만나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시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으며,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로 있게 하리라"고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우리가 사모하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길이 됩니다. 믿는 자가 받을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거부하면 영영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사람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로서 2차 대전 때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날 며칠 타고 간 열차에서 내리자 독일군 장교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씩 내릴 때마다 손가락으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켰습니다. 

그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야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른쪽으로 간 사람들은 당일 가스실에서 다 죽었고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경은 그 반대로 오른쪽으로 가도록 한 사람은 영생으로, 왼쪽으로 간 사람은 영벌로 분류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독일 장교처럼 자기 마음대로 오른쪽 왼쪽을 지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오른쪽으로, 믿지 않았으면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인데, 그것은 믿어도 내가 믿은 것이고, 안 믿어도 내가 안 믿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도 내가 믿음으로 얻은 것이요, 영생을 거부한 것은 내가 안 믿어 거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되돌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그의 심판 아래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로 가기 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가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12아들을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49장 28절을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33절에 보니까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있는 힘을 다하여 12아들을 축복하고 나니 기운이 떨어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니 유랑의 길에 올랐고, 베델 광야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으며,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라헬을 사랑하여 14년을 봉사하였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험하다면 험한 인생을 살았으나 이제 애굽의 고센 땅에 와서 비로소 안식하면서 편안한 여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갈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자기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찾아보니, 자식들에게 족장의 권위로써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 해서 축복 기도하니 그의 생명의 기운이 다 진하였습니다. 

자신이 할 일을 최후까지 다 마친 후에 사고사가 아니라 자연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 살던 시절에는 오늘날처럼 질병도 많지 않고, 사고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교통사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인병, 암병을 비롯하여 각종 이름 모를 불치병까지 난무합니다. 

감기도 옛날 같지 않고 지독합니다. 정말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최고로 좋은 것은 장수하다가 기운이 진하여 자연사하는 것이겠으나 세상이 그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고, 예수님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날 앞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 하나님께 가기 전에 꼭 내가 하고 가기를 원하는 소원을 정하고 그 일을 열심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그 일을 마칠 것입니다. 야곱은 할 일을 다 하고 갔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소원을 정하고, "내 생명의 길이가 얼마나 될런지 모르나 하락하신다면, 이것도 하고 또 허락하시면 저것도 하기를 원합니다"라는 절실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십니다. 어떤 분은 나이 50에도 공부하기를 소원하여 신학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전 짓는 일을 소원하여 성전 짓는 일에 상당 부분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여생을 돌보는 무료자선 시설을 소원하여 그 일을 위해 지금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인생은 나면서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모를 때의 사람이지만 열조의 신앙을 이어서 세상에서 살다가 가야 할 곳으로 마땅히 갈 줄 알고 두렵지도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여러분, 끝이 좋아야 진짜 좋은 겁니다.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휙~ 하고 뒤집어져서 용두사미가 되면 얼마나 민망합니까? 그래서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가장 잘 웃는 자이다."(He laughs best who laughs last.) 매년 연말을 맞이하는 것처럼 누구라도 예외 없이 인생의 끝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을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천국 비자를 받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죽음은 모두에게 오는 것이요,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예외적인 일도 아닙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하게 살면서 우리가 소원하는 바 할 일을 다 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기운이 진하여 담담한 심정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이별하고, 앞서간 신앙의 열조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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