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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고전 16: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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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고전 16:15-18)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첫 인상입니다. 첫 인상이란 그 사람의 생김새를 의미 한다기보다는 그 사람으로부터 전해지는 전반적인 느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라는 것은 대체로 정직한 것입니다. 내가 느낀 그대로입니다. 굳이 다르게 느끼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때의 느낌은 정직한 것입니다. 일단 느낀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것은 자기 교양의 문제이지 일단 느낌자체는 정직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도 그 느낌을 굉장히 중요시 하지 않습니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다고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또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아쉽고 얼마든지 함께 있고 싶고, 잠깐 만난 것 같은데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나간듯한 아쉬운 느낌을 주는 좋은 분위기의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함께 있어도 별것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남자들의 양복 소매에 달린 단추 같다고 합니다. 남자들의 양복 소매에 달려 있는 여러 개의 단추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있으나 없으나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을 만날 때 생기는 이 첫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보면 서로에게 대체로 좋은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친구라고 합니다. 

[니코마코스] 라고 하는 사람이 우정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쾌락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 우정은 그저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얼굴보고.... 그 순간이 좋아서 만날 뿐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용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얻어지는 이득이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또 사귀어 두면 이모저모로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그런 의미의 우정입니다. 

세 번째는 덕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만남은 서로가 그 인격을 존경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 속에 존중이 있고, 만남 속에 경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다함께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함께 있고 싶고, 무엇이든지 주고 싶고, 받고 싶은 기대감이 있고, 존경하고 인격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하며 삽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이 있음으로 행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정말 가치 있는 인간관계란 첫인상도 중요하고, 첫 느낌도 중요합니다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어 주고, 슬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고, 오해가 있는 사람에게는 더 오해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풀어 주는 사람이 되고, 문제가 있는 곳에 해답을 가져다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부족을 채워 주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이런 사람이 몇 나옵니다. [스데바나] 와 [브드나도] 와 [아가이고] 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람들을 일컬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이 시원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작은 일 하나도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든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인해서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나 깨나 마음에 무거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달려가서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몇 사람을 책벌해야 될 것 같고, 심판해야 될 것 같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어렵습니다. 또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회개하고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마음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책망을 해야 될 것 같고, 옳고 그른 것을 따져 심판해야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문제가 쉽지 않고, 또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왔고 그들의 방문을 받은 바울은 그들을 보고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상한 마음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속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가 이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과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기에, 또 무엇을 행했기에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느냐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15절을 보면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 이라고 말씀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 때에 만나도 남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섬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한 섬기되 끝까지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 섬기기로 했으면 꾸준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한번 봉사하기로 맹세했으면 죽는 날까지 봉사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이랬다저랬다 합니까? 

저는 여러분을 볼 때마다 ‘이 분은 예중교회를 위해서 평생 섬길 분이다.’ 라는 느낌이 들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까? 교회를 섬기든, 성도를 서로 섬기기로 한 번 작정했으면 변함없이 섬기는 사람이 되어서 언제만나더라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메리히] 라고 하는 사람이 <인간자본> 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자본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있어서 아주 유익한 자본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돈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학력 있는 사람, 경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 보다 먼저는 <의욕이 있는 사람> 그 다음에는 <책임성이 있는 사람>, 그리고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 이 정말 소중한 인간자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행복이 없는 사람이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충분한 감사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섬김은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고로 섬기는 일을 즐겁게 여기고, 의욕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생애에 바른 목적이라 결심하고 섬기는 인간자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은 17절에 있습니다.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는 말씀입니다. 이 보충적이고 협력적인 자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혼자서 떠들고 일하는 것, 사실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없지만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이것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흔히 있는 일이랍니다. 유대사람의 생선가게 옆에 한국 사람이 생선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큰일 났구나!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해서 새벽부터 일을 하니까 손님 다 빼앗기겠구나.’ 하고 걱정을 한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으면 그 옆에 한국 사람의 생선가게가 또 생긴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안심한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한국 사람들은 같이 망할 때까지 경쟁하고 질투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창피하지만 이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람의 기질입니다. 혼자 앞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은 잘해도 뒤에서 이름 없이 섬기고, 받들고, 봉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둘만 모이면 싸우고, 셋이 모이면 망한답니다. 협력할 줄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생선가게를 하면 다른 사람은 그 옆에서 얼음장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이게 안 되거든요. 서로에게는 보충적인 협력,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혹 여러분 피곤합니까? 그렇다고 내가 남을 피곤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답답한 사람은 답답한 중에 있는 사람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말을 전해도 좋은 말, 기분 좋은 말,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말을 전하는 자가 아름답습니다. 꼭 그렇게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전해야 하겠습니까? 뭘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헤밍웨이]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나쁜 것이다” 그렇습니다. 선한 말, 선한 행위는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이고, 악한 말, 악한 행위는 언제나 결과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답답함을 더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까? 사람으로 인해 행복을 누리고, 사람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특히나 신앙의 관계 속에 있는 우리들은 누구에게나 시원하게 하는 신앙인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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