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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 광야에 서서 (마 1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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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광야에 서서 (마 11:7-12)

[윤동주 시인] 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일이 /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삶을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 물을 것 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 좋은 말과 좋은 행복의 열매를 /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인생이란 길지 않은 짧은 생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여러분은 이 결론에 공감하십니까? 정말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인생의 진리입니까? 인간은 생을 즐기며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은 행복할 권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또 누구나 다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 되는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적용 되는 그것은 인간 창조의 문제입니다. “인간을 누가 만들었느냐” 의 문제입니다.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물질에서 원숭이로, 원숭이에서 인생으로 진화 된 존재라는데 동의하며 사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볼 때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진리는 그 누구도 어떤 인생도 하나님과 교제 없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때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허무할 수도 있고 자랑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도 인생의 마지막에 참으로 잘 달려왔다고 자부하며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이가 있느냐하면 그렇지 못한 이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딤후 4:6-8에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고백은 우리 신앙인들의 인생 마지막 고백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하루하루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하는 것이 인생을 마칠 때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천 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맴돌며 신앙생활 한다고 합니다. 자랑도하고, 자부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의 마지막이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여러분, 처음이 좋았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 신앙의 현 주소를 묻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의 봄에 서 있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신앙의 가을에 서 있고, 혹 어떤 이는 신앙의 겨울에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두에게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광야입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서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도 내 스스로가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곳입니다. 의미를 만들어야 하고, 지켜가야 하고, 무언가를 남겨야 하는 곳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곧 광야란 말입니다. 
인생, 광야에 서서 무엇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할 시점입니다. 

세례요한이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증거하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푸시며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을 알고 옥에 갇힌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혼란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메시아가 확실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유하신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구약에 예언한 구속자가 자신임을 우회적으로 밝히시면서 6절에 덧붙이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면서 옥에 갇힌 요한에게 신앙의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의 훌륭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치 광야에 서 있는 우리들의 인생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하면서 담대하고 진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갇히고 보니까 사람들은 요한도 별 수 없이 신앙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바람도 요한을 흔들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라는 강력한 어조가 묻어 있습니다. 심지가 굳은 요한의 신앙을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각자의 인생 광야에 서 있는 우리에게 신앙의 구경꾼들이 되지 말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일렁이는 갈대와 같은 신앙은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의 구경꾼으로 거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인이지만 세상 속에서는 적당히 타협하고, 교회 안에서는 적절하게 묻어 사는 카멜레온 같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람이 언제 어디서 거세게 불어올지 모르는 광야 같은 세상 속에 우리는 오늘도 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만은 구경꾼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세례요한은 결코 약하거나, 망하게 되었거나, 조롱을 받을 만하거나, 사치로 쓸모없게 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요한이 헤롯의 죄를 묵인해 주고 모른척 했더라면 지금 감옥에 있을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서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즉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아첨이나 하여 자신의 욕망을 누리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자기가 희생하지 않으면 편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좀 덜 드리면 내 생활이 윤택해 질 것 같습니다. 십일조 하지 않고 십의 영점 오조만 하면 나머지는 내 삶에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그 편한 삶이 훨씬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마치 부드러운 옷 입고 사는 것처럼 충분히 이런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질문이 우리 신앙의 결단을 요구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제 나름대로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절망의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어둡고 쓸쓸하게 보입니다. 장미색 밝은 안경을 쓰고 생을 내다보면 그의 생의 대부분이 장미 빛처럼 기쁨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회색 빛 안경을 쓰고 생을 바라보면 인생이 음울한 회색빛으로 보일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을 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바라며 신앙 생활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무엇을 보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까? 인생 광야에 서서 “무엇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의 가을이 오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 삶이 아름다웠느냐, 열매를 맺었느냐고 묻겠다는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내 인생의 광야에 서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훗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무엇 했다고 답하기를 원하며 오늘 광야 같은 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오늘, 광야에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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