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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롬 7: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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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롬 7:17-20)

차선과 최선 사이에서

지난주에는 최악의 선택에서 소망을 보았다면, 오늘은 차선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의도적 차선을 선택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오는 것이지요.

언젠가 한 젊은 목사님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선교지에서 10여 년을 지나다 몸이 좋지 않아 치료하기 위해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었는데, 그 사이에 한 교회에서 몇 주간 설교를 요청받았습니다. 교회는 갈라지고 싸우므로 상처가 있던 상황이었고, 이 선교사님의 설교로 치유를 받은 것 같습니다. 얼마 후 교회에서 정식으로 요청이 왔답니다. 
“선교사님 우리 교회의 목자가 되어주세요!”
너무나 간절한 요청, 그러나 선교지에서 역시 이 선교사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워 저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결정하실 건가요? 답을 주세요.”

과연 이 선교사님에게서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요? 아마도 선교사님이 고민하는 것은 내적으로 이런 것일 것 같습니다. 똑같이 다 불쌍하고 목회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하나는 육신의 안락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의 선택은 또 고통의 시간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똑같은 영혼인데 어떻게 결정해야 하나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정리가 되네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지금 상황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느 쪽에 마음을 주시느냐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으면 결코 답이 없습니다.

“사명을 벗어난 그 어떤 선행도 최선이 될 수 없다!” 좀 무서운 말이기도 하죠. 그러나 아무리 무서워도 진리이기에 가슴에 새겨야 할 말입니다.

적절한 예화가 될 듯합니다. 

해안선에 등대가 우뚝 세워져 있었습니다. 배들은 항상 등대 불빛을 보며 방향을 잡고 안전하게 항구로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기름 창고에는 기름이 늘 공급되어 있었습니다. 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정부에서 공급되는 기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주유소가 없는 곳이라 사정하기에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이튿날 가난한 할머니가 오더니 추워서 못 자겠다면서 기름보일러에 기름을 좀 채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정이 딱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또 한 자매가 와서 등에 넣을 기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처지가 난처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등대에 넣을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밤 배 몇 척이 파선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조사단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주었는데 왜 등대 불이 꺼졌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등대지기는 사정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국자는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기름을 공급한 이유는 오직 하나 등대에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직무 유기입니다. 구속되어야 합니다.>
차선은 최선의 적입니다.

최선과 차선의 문제에서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면 문제가 없지만, 참 순종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가 인간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최초의 인간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게는 늘 선을 행하려는 의지보다는 육신의 욕망을 향한 죄의 본성이 들어왔다는 것이죠.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며, 예배하며 살면서도 이 어그러진 본성 때문에 이제는 죄의 문제로 고민하기보다는, 아직 다 이기지 못한 육신의 정욕의 문제로 고민하죠.

어떤 개구리가 몹시 아파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렇게 병이 깊어질 때까지 병원에 안 오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냥 좀 지나면 나을 것 같아서."
"나 참, 이 약을 하루 세 번 드세요.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 죽게 되는 병이기 때문에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를 뒤로 젖히면 안 됩니다."
개구리는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개구리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약을 먹다가 고개 젖혀서.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한 결정들이 후회하는 결과들을 만들 때가 많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이런 종류의 것이죠.
특히 결혼의 문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인생을 참 힘들게 만듭니다. 최적의 상황에서 결혼을 해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와 갈등을 경험하는데, 어쩔 수 없어서 결혼한다면.

언젠가 우리 교회 청년 한 명이 참 어려운 상담 편지를 보냈습니다. 
23살의 나이에 이미 3살의 자녀를 둔 그 청년이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아이를 잘 돌보지 않고, 가정에도 소홀합니다. 
꼭 해야 할 결혼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결혼을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몇 달 전 한국 미혼모 협회에 가서 월드휴먼브리지 이름으로 우리 교인들이 부활절 헌금한 것을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8만 명이나 되는 미혼모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해이로 미혼모가 된 사람들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들로 아이를 키우게 된 어머니들의 고통의 문제였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면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한 미혼모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목사님은 미혼모들을 도우려고 하시나요?”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혹시라도 미혼모를 돕는 일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미혼모를 돕는다는 것이, 결과를 수용하므로 도덕적 문제를 너무 쉽게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미혼모가 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죠, 그러면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미혼모가 되어 아픔을 안고 사회적 장벽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미혼모를 돕는 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하게 발생한 일, 아니 우리의 실수로 고통 받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망가져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이전처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혼이 괜찮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혼하고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회복시켜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픔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연약한 인간이 가잔 불가피한 결과일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구제가 불능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스프라울(R.C.Sproul) 이 쓴 <반대 의견의 극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성장한 유대인 소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 회당에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도 신앙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10대 소년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이 없어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다만 루터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다 루터 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유대교를 포기하고 루터교로 개종한다.> 
가족들이 물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이 루터 교인이다. 루터 교인이 되어야 사업상 유리하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그 소년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유명한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다.>

하나님 없는 민중, 종교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산주의를 창설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영원을 보지 않고 영원하지 않은 물질을 따라간 아버지.
최선을 따르지 않고 차선을 따라간 아버지.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생겼습니다. 영원이 아닌 것은 차선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는 데 물질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내게 있는 물질 중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은 영원, 최선이요,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는 물질은 없어지는 차선입니다.
우리의 물질이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안 하는 것이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자처한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최악의 선택에서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로 고통받는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처를 보지 않으면, 회복이 아닌 악순환의 고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이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고백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도 나를 붙들고 내 인생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을 우리는 “은처”라고 하지요.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인생 말입니다.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인생은 수없이 많은 쓴 뿌리로 계속되는 상처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차선을 선택하며 후회하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항상 내릴 수 있는 하나의 옳은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현재 잘못된 상황도, 우리의 상처와 아픔도, 왜곡된 결과들과 좌절,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상황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는 과정을 통해, 광야의 40년을 통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어쩌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민수기 14장에서 정탐꾼을 보낸 사건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탐꾼을 보내신 이유가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그 땅을 보고 확신 있게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로 눈앞에서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어쩌면 ‘차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최선은 ‘차선’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들의 입술은 ‘어쩔 수 없어서’일 경우가 많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이스라엘의 최선의 선택은 안전한 길을 택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들의 힘을 가지고는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무리인 듯합니다. 그들은 애굽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들도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민족이 더 강해지고, 훈련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선택의 배후에는 “두려움”이라는 존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순간부터 이미 그 땅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두려움이 삶에 들어오는 순간 적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광야에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을 했겠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했다면 “전쟁은 불가피했을지 모르지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자신들의 능력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무리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확고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 13:31)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최선의 선택은 치열한 헌신과 대가를 수반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선택이 귀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기꺼이 대가를 내려는 의지와 헌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아픔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철 지난 달력을 그대로 걸어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신혼여행을 가서 결혼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결혼식에서 서약한 것을 무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고 울며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참으로 가혹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38년을 더 방황해야 해고, 당시 성인들은 삶의 전성기를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어린 세대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부모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38년을 광야에서 지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있었지만, 그 결과를 선택할 자유는 없었습니다. 
선택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픔을 넘어 선 회복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선택을 보면서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아니, 지금 여러분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며 잘못된 선택 때문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나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 중의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죄와 불신앙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로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전쟁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추운 밤의 매서운 한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불순종의 심각성과 ‘차선’을 택한 그들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하셨고, 차선의 선택으로 빚어진 고통의 시간 가운데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단지 그 아픔을 넘어서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바로 광야를 함께 거니시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고, 우리가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때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어리석음을 통해 최선의 하나님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 때, 인터넷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때 유명했던 목사님의 성 추문, 그리고 그분이 다시 목회를 시작한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사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고 목회를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저 자신을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아까운 재능을 가진, 한 때 저 자신도 가장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으로 생각을 하던 분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왜 그런 길을 가야 했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목회를 그만두어야 하나? 아니면 다시 회복하여 재기해야 하는가?
문제는 회복의 시간을 지나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은혜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을 기만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아니, 누군가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다고 한다면, 정말 죄를 짓고 고통가운데 괴로워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포자기할 때, 나는 신앙적으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모든 사람은 외면하고, 당신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이 또한 당신에게도 동일하게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런 질문을 수없이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불신앙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모세는 여러분 불순종하는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14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라는 책에 보면 참 멋진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 말씀은 황량한 바람이 일렁이는 사막에서 한 잔의 신선한 물과도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 중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겠지만 용서받은 상태로 죽게 될 것이다.“

용서받은 자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들은 용서의 은혜를 경험했고, 용서의 과정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그것은 용서받은 자의 대가였습니다. 용서하심을 받고 그 길을 가던 이들이 힘들기는 했지만, 이미 축복을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용서가 무엇인가요?

깨어진 관계와 허비한 시간, 치명적인 손해들을 되돌려 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 주지 않을까요? 용서의 순간 우리의 삶은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바뀌지 않겠습니까?
용서는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효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용서를 받아들이는 순간, 후회로 끝나 버릴 우리의 인생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한 번 최선을 삶을 향한 선택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축복은 우리를 넘어 우리의 자손에게 유업으로 이어집니다.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했지만, 끝까지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시간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제가 미혼모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모의 잘못과 실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태어난 그 생명이 그렇게 후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살아왔던 삶을 따라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계속되는 죄와 악순환과 빈곤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으로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에 나오는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부모나 배우자 혹은 상사나 친구와 같은 타인의 실수와 불운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초래한 상황이나 악화된 형편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런 잘못된 선택들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광야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나치의 무서운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 여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구덩이는 없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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