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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고전 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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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고전 12:12-31)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글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여러 가지라고 썼습니다(고전12:4-6, 8-10).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시는 이는 한 분이심을 또한 강조했습니다(고전12:6, 11).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 교회 안에서 그렇게 다양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이유는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되고(고전12:7) 신자들이 다양함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두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하다”는 말을 줄여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본문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팔, 다리, 머리, 허리, 손가락, 발가락이 혹은 하나 혹은 둘 혹은 열 개씩 있고 머리에도 두 눈, 두 귀, 코 하나, 입 하나가 있지만 그 여러 서로 다른 지체들이 모여 오직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서로 다른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다 모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게 만드셨다면 그 모든 지체는 크던 작던 다 고유한 기능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와 기관이 각각 그 있어야 할 고유한 자리가 있으며 각각 그 나름대로의 중요성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몸의 모든 지체는 서로 유익하게 보완하고 합력하여 온전한 한 몸을 이루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당회와 제직회가 갈등하거나 남선교회와 여전도회가 서로 으르렁거리거나 권사회와 안수집사회가 반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당회 안에서 모이기만 하면 싸운다거나, 권사회 안에서 출신학교를 따라 나뉘어 서로 미워하고 견제하는 일이 있다거나, 집사들 사이에서도 출신 지역에 따라 보이지 않는 다툼을 한다면 그 집단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진정 한 주님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면 서로 간의 대립과 반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있는 지체들끼리 싸우는지 아닌지만 한 번 생각해봐도 금방 자신이 얼마나 교회답지 않은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손과 발이 치고 받고 싸우지 않으며 입과 코가 다투지 않고 눈과 귀가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부서끼리, 기관끼리, 단체끼리 서로 갈등하고 대립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한 성령의 역사로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한 세례를 받아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3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본문 14-16절에서는 교회에서 신자들 각각의 은사나 직분이나 사역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한 몸을 이루지 않는 것이 아님을 사람의 몸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한 것입니다. 

본문 17-21절에서는 한 몸에서 모든 지체는 그 각각의 고유한 자리와 쓸모가 있음을 말하며 교회 안에서도 모든 신자들이 각각 설 자리와 할 일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본문 22-25절에서는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더 중요해 보이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요긴하고 귀중하게 만드셨음을 강조하며 교회 안의 여러 은사, 직책, 사역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귀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5절 말씀은 특히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체를 다 귀중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지체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함께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끼리끼리만 관심 갖고 위하는 분파주의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 제일 못생긴 부분을 꼽는다면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대체로 발가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발가락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발가락 하나에만 이상이 생겨도 걷기가 힘듭니다. 혀는 우리 몸에서 제일 연약한 지체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혀가 없으면 우선 말을 할 수 없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눈썹이나 코털 같은 것은 정말 존재감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지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초경량이고 잘 뽑혀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없었다가는 눈이나 기관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게다가 눈썹이 여성들에게는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얼마나 중요합니까?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눈썹이나 코털이 할 일 절대 대신 못해줍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 귀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미미해 보이는 곳에서 별 일 아닌 것 같은 일들로 섬기는 이들이 사실은 얼마나 교회에 긴요하고 소중한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감당할 수도 없을 일들을 말없이 수행하는 많은 교우들이 구석구석에 있어서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 그런 일에 봉사하는 이들은 현재 맡아 행하고 있는 직분과 사역의 중요성을 모르고 무조건 커 보이는 자리 높아 보이는 직분에 오르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높은 자리인가 큰 일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자리이고 일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출세욕, 감투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어려움을 일으키곤 합니다. 평생을 자기의 은사에 맞고 보람과 기쁨이 있는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이들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낮고 이름 없는 직분 같이 보일 뿐 하나님께는 다 같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작아 보이는 직책이 더 요긴하고 더 귀할 수 있음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안 그러시겠지만 권사가 뭐라고 권사 되는 데 목숨 걸다시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숨 걸다시피 해서 원하는 직분을 얻었으면 충성해야 할 터인데 일단 되고 나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부장도 안 하겠다, 총무도 안 하겠다, 구역장도 안 하겠다, 기도도 안 하겠다 하면 무엇 하러 권사는 된 것입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수요 저녁예배에서의 기도를 권사님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맡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시무권사가 삼백 명이 넘습니다. 그러면 권사 한 분이 수요일 저녁예배에 기도할 차례는 육 년에 한 번 돌아옵니다. 오십대 초반에 일찍 권사가 되신 분의 경우 평생 세 번 기도할 기회가 오고 대부분의 경우는 두 번이나 한 번밖에 차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 생 단 한 번의 기도조차 못 하겠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댄다면 과연 스스로 권사라고 자부할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권사가 되가지고는 일은 죽어도 안 하려고 발버둥치는 분들 때문에 요즘 당회원들 사이에 말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아예 권사 선거는 하지 말고 당회가 맡기는 직책을 맡아 성실히 봉사하겠다고 서약하는 분들만을 권사로 임직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본문 26-27절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어느 한 곳이라도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프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고통과 영광과 기쁨을 다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본문 28-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직분과 은사를 다 존중하되 사람들이 스스로 인위적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그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이미 여러 부서에서 맹렬히 봉사하면서도 사람숫자가 많은 찬양대에 들어가야 확실하게 장로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노래에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 찬양대에 들어와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이 교회마다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나 그의 뜻은 제쳐놓고 너도 나도 다 장로가 되겠다고 하고 여자는 모두 권사가 되겠다고 하며 남자는 모두 안수집사가 되겠다고 하면 지금 서리집사님들이나 평교우들이 하고 있는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교회 섬김은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양하고 사람마다 받은 바 은사는 다 다른데 온갖 은사를 다 가지겠다고 쓸 데 없는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신자가 반드시 가지기를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습니다. 그 은사는 하나님께 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은사와 직분과 사역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이에 충성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새문안 교회의 교우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들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교회 안의 모든 일을 소중히 여기며 받은 바 은사대로 기쁨 가운데 충성을 다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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