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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부조리 (전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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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부조리 (전 8:1-7)
  

들어가는 말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한 마을에 사는 집집마다에 매일 만원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눠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만 원씩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 원씩을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두 번째 주 쯤 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까지 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졌습니다.

세 번째 주 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주쯤 되었을 때는 매일 만 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 끼 밥을 먹고, 출근하는 것과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 그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투덜대고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왜 내 돈 만 원을 안 줍니까?”라고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매일 만 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들이마시는 공기, 마시는 물, 농사지을 수 있는 흙,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에는 적은 보수도, 낮은 직책도, 불비한 근무환경도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느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받는 것도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이 되고, 오히려 불만이 쌓이지 않습니까?

아무 탈 없이 뛰고 있는 내 심장,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진 내 생명, 잘도 버티어 주고 있는 내 육체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감사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감사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축복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십시오.

오늘 본문인 전도서 8장에서 다루게 될 문제는 삶의 부조리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살고, 악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은가?’ 
‘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의 인생은 꼬이고, 그르게 사는 사람의 인생은 잘 되는 것 같은가?’ 
참 이해가 안 되는 문제이지요? 
그래서 부조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부조리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면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
전도서 8장에서 몇 가지지혜를 얻습니다.

1. 첫 번째 본문의 가르침은, 악한 권위(권세)일지라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첫 번째 등장하는 본문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 관원에서 악한 일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매일 겪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상관이 시켰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악한 명령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이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2절에서 뜻밖의 답을 줍니다.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 말씀의 의미는 비록 악한 권위일지라도 그 권위에 대하여 무조건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악한 사울왕은 거의 10년 동안이나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쫓아다녔습니다. 
다윗이 엔게리 동굴 안에 부하 3천을 거느리고 은신하고 있는데 사울 왕이 용변을 보기 위하여 그 굴에 들어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다윗에서 진언합니다. 
그때 다윗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아십니까? 

삼상 24: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은 악하지만 그를 왕으로 세운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그 권위를 인간이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이런 태도가 옳다고 칭찬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반민주적인 권위주의를 없앤다고 하다가 권위자체를 없애버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 도올 김용옥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을 ‘노씨’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떴습니다. 
그랬더니 네티즌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어떻게 ‘노씨’라고 부를 수 있느냐? 옆집 사는 아저씨한테도 이름 석 자는 부른다.”고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대통령한테도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고 막 덤빕니다. 

대학가에 가보면 대학생들이 대학 총장이고, 학장이고, 교수이고 간에 막 말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막 대듭니다. 
사회에서도 어른들의 권위가 무너져서 청소년들을 지도할 수 없어요.
왜 위에 있는 권위(권세)를 무시하면 안 됩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또 다른 하나는, 권위가 무너지면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그 공동체는 끝장이지요. 
우리가 작금의 권위 파괴현상을 염려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부모님이 완벽해야만 자녀들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거꾸로 질문해보지요. 
자녀들이 순종하는 것은 부모님이 완전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스승이 완벽해야만 학생들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직장 상사가 완벽해야만 부하직원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완벽해야만 순종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 순종이란 덕목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어디에도 완벽은 없으니까요! 
지혜자 솔로몬은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로운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삶의 부조리를 종말론적인 삶의 관점에서 다루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악한 사람들이 형통함을 보면서도 회의에 빠지지 않는 것은 선한사람의 최후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은 올 것이고, 악인은 결코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본문에서는 악인을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그림자가 가장 길 때가 언제입니까? 

해질 때입니다. 
정오에는 거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해 저물 때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곧 어둠이 시작될 것이고 그때에는 그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따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마지막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이런 종말신앙만 확실하게 갖는다면 우리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언젠가 재개발계획에 따라 곧 이사를 가게 될 가정에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사 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뭘 잘못 던졌는지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주인이 화를 냈을까요?

별로 후덕해 보이지도 않은 집사님이 그냥 웃으면서 “조심해야지!” 이 한마디 하고 말더라고요. 
벽에도 낙서투성입니다.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며칠 안 살면 이사 갈 거니까! 우린 갈 곳이 있어!’ 
이런 마음으로 살기에 느긋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삶은 남다른 여유와 넉넉함과 격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현실을 막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알차게 사는 것입니다. 
곧 주님 앞에 선다는 의식이 선명한데 어떻게 되는대로, 막 살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알고 그 일을 하려고 하겠지요?
어떻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겠어요?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삶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조차도 감사의 조건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이 100% 부조리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부조리가 있고 악한 상황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구석구석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복이 반드시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라고 말하지만 남다른 건강을 가진 사람이 있고요! 
“나는 못났어!”라고 말하지만 남다른 후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있고요!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남다른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요! 
남편은 별로인데 자식 잘 둔 자매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참 공평합니다. 
다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없고요, 다 나쁜 것만 가진 사람 또한 없어요.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남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헤아려서 그것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을 깨닫고 감사하게 살면 그 감사는 우리를 두드러지게 합니다.
대학교의 교목으로 일하시는 목사님이 한 얘기입니다. 
학교교정을 오고갈 때 간혹 고마움을 표현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답니다. 
“선생님, 지난번 채플 때 들려주신 말씀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때마다 그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고맙네, 그런데 어느 학과 몇 학년 누구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는 거지요.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될까? 
생각하던 중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감사는 감사하는 사람을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눅 17:11-19절에 보면, 문둥병을 고침 받는 열사람 중에서 오직 한 명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두드러진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때때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참 부조리하다고 느껴집니다.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징징거리지 마시고,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봅시다.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행복한 사람’이란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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