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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나아가십시오 (히 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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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1-28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믿고 늘 친밀하게 동행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는 놀라운 성경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통독으로 읽어 보신 분들은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됩니다. 왜 이리 내용이 복잡한 것입니까?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 아래 살아보지 않았기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이해하기 힘들고 지루해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비교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전에 먼저 구원받을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완벽합니다만, 그 율법 조항을 완벽하게 다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에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요제, 소제, 화제 등 복잡하고 많지만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속죄 제사와 또 하나는 감사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제사 제도의 중심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는 지파로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 “너희는 전문적으로 성전 봉사를 하라!”고 정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개인적 소유나 성공을 꿈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며 살았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역할에는 제사만 아니라 중보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흠없으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한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율법에 의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졌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왕도 없었고, 예언도 그쳤던 때입니다. 오직 남은 것은 제사장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시고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폐하셨다는 말씀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인 것이 아상한 일이 아니라고 성경의 근거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신비한 존재인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복을 받고 또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3절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워두셨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곧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2절 ... 첫째로,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그는 또한 살렘 왕인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왕이며 동시에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도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만든 정치 체계 중에 가장 정의로운 정치 체계가 공산주의인 것을 아십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 이 비전에 수많은 지식인과 청년들이 목숨도 바쳤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정의가 가진 한계입니다.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와 사랑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지만, 평화를 사랑하다가 정실에 흐르고 부패가 일어나고 불의한 일도 용납하는 경우 역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굳이 의의 왕, 평화의 왕이라 함은 완전한 의, 완전한 평강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완전하다는 단어가 네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은 불완전한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렸던 제사도 당연히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11절 ...만일 그 제사직으로 완전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아론의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다른 제사장이 생겨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은 자신도 죄에서 온전하지 않았기에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속죄 제사를 드리기를 반복하여야 했습니다.

18-19절 전에 있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하는 것을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종교생활의 특징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살아지지는 않으니 겉으로 꾸미며 삽니다. 결코 기쁨에 이르지 못합니다. 열심도 충성도 있지만 계속 죄를 짓고 또 용서받는 일만 끝없이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고 삽니다.

이러한 불완전하고 두려움이 사로잡힌 종교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율법생활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당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24-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레위 지파 제사장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4-25절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늘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생활을 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도 율법생활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이클 야코넬리는 그의 책 [영성]에서 마가렛이란 소녀 이야기를 했습니다. 9살, 학교에 늘 지각을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인 가너 선생님은 대단히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늘 깔끔하고 흐트러진 모습이라곤 눈을 씻어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이 분은 마가렛이 너무나 못 마땅하였습니다. 

어느 날 역시 지각을 한 마가렛을 가너 선생님은 불러 내었습니다. 반 학생들에게 한 가지씩 마가렛의 잘못된 것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마가렛의 불성실한 면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씩 나와서 칠판에 마가렛이 평소에 잘못하고 있는 것을 썼습니다.“마가렛은 미련해요. 이기적이예요. 뚱뚱해요. 멍청해요”스물다섯 가지 죄목이 칠판에 가득 쓰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은 마가렛에게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영혼에 새겨져 지울 수 없는 독이 되었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온 마가렛은 침대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눈물로 그 고통을 씻으려고 했지만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40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그러했습니다.  

율법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말씀은 알지만 살아지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한동안 예배당의 강단을 지성소라 아무나 올라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감히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선교회 헌신 예배 때, 강단 아래에서 사회보고 기도하고 성경봉독하고 광고하고 특송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누구라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열렸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운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릴 때 정말 이상했다고 합니다. 여선교회 회원들은 한복도 입고 머리도 하고 화장도 잘하고도 강단에 올라가지 못하는데, 사찰 집사 아줌마는 반바지만 입고 청소한다고 막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이처럼 율법적인 종교생활만 하는 이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없이 교리로만 믿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10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고해 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제에게 대신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의 사역을 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두려움에서 자유함으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명령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해 주십니다. 죄짓지 않게 해 주십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에게 원수도 용서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감동적인 만남이고 동행함입니다.

이상춘장로의 삶과 신앙을 담은 책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출간되었습니다. 장로님의 장례식 후 장로님에 대하여 아는 분이 너무 적고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 다 잊혀질 것이 아쉬워 장로님의 삶을 책으로 엮어 보리라는 마음을 먹었었는데, 책이 되어 나왔습니다.

2007년 전국 신학대학원생들 연합 집회에서 전도사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을 때, 한 전도사님이 질문을 하였습니다.“정말‘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목사님 교회에 있기는 한가요?”좀 당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상춘 장로님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신 분이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상춘 장로님이야 말로 이 말씀대로 사신 분입니다.
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주위에서 당장 임원하라 하였지만 퇴직 후 자원봉사자로 매일 출근하던 여주교도소로 가서 재소자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재소자를 바로 세우려는 비젼으로 준비하고 있는 소망교도소를 세울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3개월 밖에 더 살수 없다던 장로님이 5년을 더 사셨습니다. 매주 주일 예배 후 기도를 받으시고 가셨고 암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하나님, 고쳐 쓰시옵소서. 아니면 이대로 쓰시옵소서. 그것도 아니면 데려가옵소서.”담대하게 기도하시고, 기쁨이 충만하셨던 장로님의 얼굴이 선합니다.
장로님의 오직 하나 기도 제목은 황달이 없고 복수가 차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혹 병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교도소 사역에 덕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장로님의 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장로님은 나중에 “암이라도 감사합니다.”하는 정도를 넘어 “암이라서 더욱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동행하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내 정갑연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임종하기 전 날 장로님은 천국을 보고 주님을 보신 것 같습니다. 입을 딱딱 벌리면서 기뻐 웃으시더랍니다.

스코틀랜드의 R. 프르스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어느 주일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목사님이 안 나오시는 것입니다. 교회 비서가 찾아가서 밖에서 들어보니 말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래서 `누구와 대화 중인가 보다, 대화가 길어지는구나.'하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러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답니다. 잠시 후에 가보니 여전히 대화를 하고 있어서 가만히 엿들어 보았답니다. "당신이 안가시면 나도 안갑니다"하며 누군가에게 사정하는 얘기였답니다. 누군가? 하도 궁금하여 문을 살며시 열고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준비는 다했지만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저 혼자 갈 수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살 수 있습니다.
“주님, 함께 가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습니다. 직장에 가지 않겠습니다. 일하러 가지 않겠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가장 놀라운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과 한 몸으로 연합된 복을 받았습니다.
이 보다 더 친밀함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가운데 우리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성찬을 통하여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한 구원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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