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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시 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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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시 146:5)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유태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랭클(Viktor Frankl) 박사는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태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기록으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란 저서를 남겼다합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합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 

그는 수용소에 있는 인간상을 이렇게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희망을 끝까지 가진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기 혼자서 희망을 이룰 뿐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을 도와주고 희망을 계속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이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 

1944년이 저물 무렵 수용소에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은 모두 석방된다는 희망적인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한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정월이 되었는데도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수용소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 때에 죽어나간 수의 16배나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고 합니다. "나도 그 무렵 사경을 헤맸지만 이 참담한 모습을 관찰하여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죽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로 이 땅의 고난을 헤쳐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내 인생은 물론 영혼까지 맡기는 전폭적인 맡길 수 있는 분을 소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으로 분류되는 첫 시로서 시인은 하나님 찬송을 힘차게 외친 후,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의지할 대상을 찾아 나가다가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절)라는 목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며, 나의 소망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사람의 도움이나 받고, 사람을 의지하고 유력한 사람이 무어라고 한마디 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인내하면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소망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시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의지한다’는 말은 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조금만 서 있어도 곧 벽이나 기둥, 또는 의자에 기대고 싶어집니다. 육신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어디에 기대어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무를 베어 작은 오두막을 짓고 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쥐들이 먹을 것을 자꾸 훔쳐가는 바람에 고양이를 길렀습니다. 고양이에게 줄 우유가 필요해 소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소를 치는 소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살 집을 짓고 보니 살림이 늘어나 하녀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녀와 함께할 친구가 필요해 숲 속에 집이 늘어났고 어느덧 거기에는 작은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의지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의지할 곳이 전혀 없다는 의미의 한자어 사고무친(四顧無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고 해서 의지할 데가 없는 외로운 신세를 일컫는 말로 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을 두고자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대표적으로 귀인들을 의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귀인은 권력자를 가리킵니다. 권력을 배경에 두려했던 사람들은 이른바 ‘빽’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런 권력을 배경으로 삼으려면 돈과 결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돈으로 ‘빽’을 사는 일이 벌어졌고,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 사건이 바로 그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됩니다. 무엇을 의지하는가에 따라서 사람은 그런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권력에 의지하려는 사람은 한평생 그것만 따르다 허망과 배신을 맛보게 되고, 돈에 의지하려던 사람은 재물의 파탄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에게 찾아가 왕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하자는 왕정통치 요구안을 내놓았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삼고 강대국에 의지한 권력의 부침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의 속성을 알지 못한 채 시작한 왕정에서 백성들은 많은 허탄함을 경험했습니다. 동양에서도 천만 년에 걸쳐 권세를 누리려 했던 진시황은 50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통일제국의 권세도 불과 10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근세에 들어 우리나라를 삼킨 일본의 위세가 영원할 줄 알고 거기에 붙어 친일행각을 했던 사람들도 불과 36년 이내에 일본 제국주의가 망하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무엇도 의지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의지하고 소망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라는 책은 초교파적인 선교 단체인 국제예수 전도단(YWAM)과 열방대학의 설립자 겸 총장이신 로렌 커닝햄 박사의 저서라 합니다. 로렌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간증으로 이 책을 썼다합니다. 

그는 현재 아내 달린과 함께 하와이 코나에 거주하면서 매년 30-40개국을 다니면서 강의를 통하여 전도와 제자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합니다. 로렌의 집안에 고모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부자여서 수백만 달라 규모의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였고 교단에서 좋은 목회지를 추천 하였으나 마다하고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시는 선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집으로 가기 위해 아내 달린과 함께 밤새도록 운전하면서 애리조나에서 캘리포니아로 오는 길에 너무 피곤하여 아내와 교대하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이게 되었는데 갑자기 몸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서 땅에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타고 가던 승용차가 뒤집어지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차는 고속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목사님은 창밖으로 튀어 나온 순간 기절하였다가 깨어나니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식을 찾고 보니 아무도 없고 황량한 벌판 쓸쓸한 사막이었고 여기 저기 흩어진 옷가지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가방에 눌려 아내 달린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로렌은 아내 달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내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아내를 누르고 있는 옷 가방을 치우자, 달린은 머리 뒤쪽으로 깊이 패인 채 이미 호흡이 멎어 있었다합니다. 아내가 죽었구나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모의 사업 제의를 뿌리치고, 교단의 확실한 목회지를 마다하였는데, 이제는 아내마저 잃었다고 생각하니 다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합니다. 

이때에 사막에는 한 사람도 없는데, 어디에서 "로렌"하는 음성이 들렸다합니다. 로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합니다. 아무도 없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는 이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깨닫고 "네 주님" 하니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었다합니다. "로렌 이래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느냐?"라고 하셨다합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며 로렌은 사막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예 주님, 그래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취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잠시 후 주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 왔다합니다. "달린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말씀이 없었다합니다. 달린이 죽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를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합니다. 달린을 살려달라고 했다합니다. 그런데 달린이 숨을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소형 화물차가 도착하고 의사와 구급차가 도착하였는데, 화물차를 몰고 가던 사람이 사고가 난 것을 알고는 인근 마을에 달려가서 병원에 구급차를 이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구급차에 실려 145Km나 떨어진 제일 가까운 병원에서 가서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은 쉽게 퇴원할 수 있었고, 아내는 여러 날 수술을 받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 부부가 사고를 당한 그 시간에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부인들의 목요 아침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로렌 목사님을 아는 한 분이 "지금 우리는 로렌 목사님 가정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여 로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북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도도 그 날 아침 로렌 부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로렌은 그 날 이후 자신의 삶에서 자기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전 생애를 바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소망 해 할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시 146: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을 만든 이가 성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법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카세트, 밥솥까지 고장이 나면 그것을 만든 회사로 가지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 받는 때가 오면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와야 하는 것이 기본 이치입니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던 초창기에 미국에서 한 젊은 정비사가 포드 중고차를 샀습니다. 수리해서 타고 다니며 자기의 기술을 자랑했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던 중에 웬일인지 차가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보닛을 열고 원인을 찾으려 했으나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차가 멈추더니 한 노인이 거기서 내렸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도와드릴까요?” 청년은 귀찮아져 대충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별 거 아닙니다. 그냥 가시죠. 나는 정비사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시동은 걸리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기다리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 드리지요.” 그가 한 부분을 만지자 즉시 엔진이 돌았습니다. 청년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이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지요.”

그렇습니다. 만든 이가 가장 잘 압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 나의 고통과 아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이 모든 것과 함께 온 세상천지를 모두 만들고 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 의지하면 복이 있습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고, 편협함이 없으며, 신의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하다는 히브리 말로 ‘에메트’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아멘’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아멘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으로 ‘나도 동의합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한 시가 아멘과 같은 에메트를 본문에 담고 있어 더욱 은혜롭습니다.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함을 지키셔서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토록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의지할 수밖에 없고 소망 할 수 밖에 업습니다. 세상의 속임수는 참 달콤합니다. 달콤한 것일수록 의지하면 안 됩니다.

보이스 피싱이라는 전화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와 건강보험료를 돌려주겠다고, 또는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환불해 주겠다고 통장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합니다.다. 돈을 준다는 말에 대부분 속아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갈수록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없어 세상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정치계와 경제계는 진실이 실종되어 사람들의 실망을 샀습니다. 그래도 진실할 것이라 믿었던 사법부, 교육계, 그리고 종교계마저 세속의 위기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마지막 보루는 진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이며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할  하나님은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고 합니다

(시 146:7-9)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7절)라는 말씀에 서 잘 나타납니다. 배경이 없어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에게 정의로 임하십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공평함으로 나타나십니다. 남을 내리누르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보십니다. 또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7절)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곳마다 가난이 없어지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살핌이 높아집니다. 갇힌 자, 맹인, 비굴한 자, 나그네, 고아와 과부들같이 약한 자를 보호하십니다(7-9절).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어 하고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나그네요 과부인 룻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친에게 효성과 순종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해 내실 사람 보아스를 예비해 두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룻 4:13).
선생님은 제자의 학문세계와 삶의 방향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미용사는 손님의 머릴 매만지고 아름다움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의 영혼을 도와주고 내 생명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만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행복할 수 있기에 감격할 수 있기에 이 감격과 행복을 노래합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

"소망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소망 소망 소망 소망을 네게 주노라"

"행복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행복 행복 행복 행복을 네게 주노라" 

무엇을 의지하고 소망하고 있습니까? 돈이라는 물질에 의지하고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어 흩날려 버리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녀나 사람을 의지하고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자녀를 이만큼 가르쳐 놓았다고 자랑하다가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막연한 앞날을 소망하는 일입니다. 내 지식, 내 건강이 얼마 가지 않아 쇠하고 치매와 기억상실이 오기도 합니다. 건강을 자랑하다가 하루아침에 쓰러진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유용한 도구이고 서로 사랑하면 살 존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런데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의 절망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행27:20~21) 

살 소망조차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객들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얼마나 통쾌합니까? 선주도, 선원들도, 로마 군인들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당당하게 외치는 바울의 모습!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 276명이 살아납니다.
   
여리고에 사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의 제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칩니다. 이 칭호는 사실상 메시아를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노하기도 했습니다(마 21:15).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어려움을 고쳐 주실 능력의 존재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바디매오가 대답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하셨을 때 만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세상의 위인으로 생각했다면 되도록 많은 액수의 돈을 바랐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길가에 앉았던 목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근본적인 것에 대한 간구로 바뀌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적을 일으킬 만한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육신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막 10:46-52)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어디에 참된 소망이 있습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짜 소망 말입니다.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마저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언젠가 세상 모든 줄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재물의 줄, 명예의 줄, 권세의 줄, 인맥의 줄, 다 끊어질 날이 옵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소망의 줄이 있습니다. 이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 줄은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줄입니다.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망의 증인들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입니다. 대 각성 전도 집회와 한 마음 축제를 준비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아무쪼록 참된 소망으로 행복한 인생 살아가며, 이웃에게 소망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며 은총의 세계로 향하는 첩경입니다.

오직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소망하되 사람의지 하지 말고 창조주가 되시고 진실하시며 진정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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