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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대의 반면교사 (눅 17: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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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반면교사 (눅 17:28-37)
  
여러분, ‘솥 안의 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시죠. 솥에 물을 붓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두면 좋다고 헤엄쳐 다닙니다. 이 때 솥을 서서히 가열하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결국 삶아져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도 비슷합니다. 위험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며 안일하게 살다가 갑자기 당하면 당황하다가 망하기 일쑤입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산다면 솥 안의 개구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인류에게 종말이 있다! 그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웃어넘깁니다. “종말은 무슨? 세상이 이렇게 잘 굴러가고 있는데?” 이럽니다. 게다가 이단들이 종말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해서 더욱 종말에 대한 거부감이 큽니다. OO년 O월 O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느니, 이미 예수님이 재림하셨는데 아무개 교주가 재림 예수라느니 ... 이런 이단들이 있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이 종말 이야기를 하면 빈정거리고 코웃음을 칩니다. 심지어 성도들조차 종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누누이 증거합니다. 신약성경만 해도 재림과 종말에 관해 300회 이상 언급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해 거부하면 성경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이 있음을 믿고 늘 의식해야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종말을 의식하고 현실의 삶을 소홀히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한번은 후배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녀들의 안부를 묻다가 막내아들이 공부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그 아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한참 웃었습니다. 그 아이가 성격도 좋고 다 좋은데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은 불러놓고 진지하게 타일렀답니다. “얘, 너 이제 공부 좀 열심히 해야지.” 그랬더니 오히려 정색을 하며 이렇게 반문을 하더랍니다. “아빠, 어차피 천국에 갈 건데 그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말을 의식하면 현실은 대충 살아도 되나요? 아니죠. 종말 때문에 현실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현실에 충실하겠다며 종말에 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끄고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극단적 현실론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극단적인 종말론이나 극단적인 현실론은 모두 성경적인 게 아닙니다. 종말이 있음을 알기에 오늘 현실 속에서 더욱 경건하게, 더욱 성실하게 사는 게 성경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경에서 그토록 종말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므로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종말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역사(우주)적 종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게 최종적인 종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개개인 인생을 두고 보면,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습니다. 역사적 종말이 닥치기 전이라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개인적 종말입니다. 이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는 종말입니다.  

이와 같이 종말은 우리 각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또 다른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분주한 삶에 빠져 살다보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기 십상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말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본문 중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 있죠. 몇 절인가요? 32절입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건 마치 포스터를 붙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흔히 포스터에 들어가는 구호는 어떻죠? 
예를 들어 불조심 포스터 같으면, 어떤가요? ‘불조심’ 한 마디만 적어놓거나 기껏해야 ‘자나 깨나 불조심’ 이렇게 짧은 글귀를 적어놓습니다. 그리고 빨갛고 굵은 글씨로 써놓습니다. 32절은 마치 그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기 위해서 빨간 글씨 포스터를 붙여놓듯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기억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죠. 헬라어 원어로 ‘므네모뉴오’(mnhmoneuvw)인데, 단순히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마음속에 상기하고 명심하는 것(call to mind, remember)을 의미합니다.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6.25 때가 되면 포스터를 그렸죠. 거기 들어가던 문구가 뭐였나요? ‘상기하자! 6.25’ 그런 식으로 이 구절을 각색하면 이런 거죠. ‘상기하자! 롯의 처!’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강조하시는 걸까요? 롯의 처야말로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멸망한 가장 비극적인 인생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과 그의 처가 살던 곳이 어딥니까? 소돔입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화려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도성이었죠. 사치와 방탕, 음란이 가득하던 곳입니다. 특히 동성애가 만연되었던 곳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조카로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곳에 살면서 점점 세속에 물들어갑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지만 소돔을 떠나지 못하다가 유황불 심판이 임박하자 천사의 경고를 듣고 부랴부랴 탈출합니다. 

그 때 사위 둘은 아예 농담으로 여겨 불신앙 가운데 따라 나오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 두 딸 등 네 식구만 나오는데, 롯의 처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롯의 처는 ‘거의 구원받을 뻔했던 사람’입니다. 대학 입시나 고시 등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들 중 가장 안타깝고 억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차점으로 떨어진 사람이죠. 거의 합격할 뻔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아예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자도 문제지만, 멸망하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왔다 갔다 하던 소위 교인들도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롯의 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말하자면 뭐에요? 반면교사(反面敎師)입니다. 반면교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역(逆) 모델을 보여주는 사람, 자신의 삶을 통해 경고를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롯의 처를 보면서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야합니다. 그래서 롯의 처와 같이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으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이 시대의 모습 : 롯의 때와 흡사한 말세지말 

오늘 이 시대는 롯의 시대와 아주 흡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rh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련된 인물들은 바뀌지만 거의 유사한 사건들이 되풀이됩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납니다. 5년 전 모습과 흡사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임기 말에 정권 실세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장면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인간성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하는 짓은 시대를 초월해서 대동소이합니다.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30절 보세요.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人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인자(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가 나타나는 날이 바로 세상 종말이죠. 

종말이란 말과 말세라는 말과 어떻게 다르죠? 종말은 시점이고, 말세는 종말이 가까운 기간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전체가 말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재림하실 때까지가 말세입니다. 그런데 종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죠. 특히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보면, 이 시대는 종말이 아주 가까운 시기, 말세의 끄트머리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롯의 시대의 모습을 보면 오늘 이 시대와 아주 흡사합니다.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은 종말의 때 있게 될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롯의 때에 평소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일상생활을 하며 살다 갑자기 심판이 닥친 것처럼 오늘 이 시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방심하다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2] 롯의 처가 멸망한 이유 : 반신반의, 세상집착

그러면 롯의 처가 멸망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녀는 롯과 함께 살면서 겉보기에는 신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없었습니다.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소돔 성이 유황 불심판으로 불바다가 되고 있는데,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됩니다. 지금 사해 바다 부근에 가면 소금 기둥들이 있죠. 아마 순간적으로 녹아내린 광물질이 롯의 처를 덮쳐 굳어진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녀의 신앙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반신반의 상태였습니다. 이건 바른 신앙이 아니죠. 불신앙입니다. 그런 상태는 세상에 대해 여전히 집착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런 상태라면 불신앙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경고하셨습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여러 가지 말씀으로 경고하십니다. 31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종말이 가까운 때에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괜히 세간 가지러 간다고 우물쭈물하다가 멸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저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사건이 생각납니다. 제가 살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철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아가씨가 기차게 치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는 젊은 여자들 사이에 뾰족구두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아가씨가 뾰족구두를 신고 철길을 걷다가 뒷굽이 선로에 끼었는데 마침 기차가 다가왔답니다. 당황한 아가씨가 구두를 빼려고 하는데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얼른 발을 빼면 되는데, 구두만 빼려고 애를 쓰다가 기차에 치어 죽었던 겁니다.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황당하고 안타깝던지! 아무리 비싸고 귀해도 그렇지 구두가 뭐라고 거기 집착하다가 참변을 당했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집착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33절도 보세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기서 목숨을 보전하려 한다는 것은 육신을 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수 있단 경고입니다.

또 34절~35절을 보십시오.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평소에 함께 사는 것 같지만, 구원과 멸망은 엄연히 나타납니다. 롯과 그의 처가 분리된 것처럼 갈라진다는 겁니다. 영적인 이산가족입니다. 

마지막 37절을 보세요.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시체가 있으면 독수리가 날아들 듯이 죄인들이 있는 곳마다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 세상에서 심판을 피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대한 집착이 심하면 곤란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롯의 처와 같이 항상 두 마음입니다.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결국은 구원도 물 건너가는 겁니다. 그런 신앙으로 어떻게 최후의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14세기 벨기에에 레이몬드 3세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잔치를 벌이고 흥청망청했습니다. 그는 국정이나 백성들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백성들과 신하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동생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차마 형을 죽이지 못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작고 좁은 문을 만들고는 음식을 절제하여 살을 빼서 그 문을 나올 수 있으면 왕위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레이몬드 3세는 왕위를 돌려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당장 눈앞의 음식에 집착해서 계속 비둔해졌고 결국 감옥에서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만큼 집착을 무서운 겁니다.

오늘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세상에 물질이 풍성해지고 향락거리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세상에 빠져갑니다.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치면 좋으련만 그게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종말이 닥치면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마는 겁니다. 


[3] 이 시대를 사는 지혜 : 경성, 성결, 충성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말세지말인 이 시대를 사는 지혜입니다. 무엇보다 정신을 차리고 경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추악함에 물들지 않고 성결하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세상이 유혹에 누구라도 다 먹혀버립니다. 영적으로 졸며 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언제 주님이 오셔도, 언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도 당황하지 않도록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결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죄악에 무감각해지고 점점 물들어가기 십상입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세상의 죄악은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나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고, 헤어 나올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고, 아무리 이익을 많이 보는 것이라도 악한 것이라면 조심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란 말이 있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데 빠지는 겁니다. 공부에 빠지면 좋은가요? 나쁜가요? 우리 자녀들이 그러면 좋아요? 나빠요? 게임 같은 데 빠지면 나쁘지만 공부 같이 좋은 데 빠지면 좋은 겁니다. 나쁜 데 빠지는 것을 뭐라고 하죠? 중독! 반대로 좋은 데 빠지는 것을 뭐라고 하죠? 심취! 

제가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너무 빠지지 말아야지.” 주위 사람들도 그랬어요. “신앙생활 하는 건 좋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마라! 미치지 마라!” 물론 잘못된 신앙에 빠지면 광신도가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에 빠지면 행복합니다. 승리합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영원히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 것, 확~ 빠지세요! 바닷가에 가서 손등이나 간지럽게 하고 끝내면 되겠습니까? 물에 풍덩 빠져 수영을 하는 게 당연히 좋은 겁니다.  

요일2:15~17에 보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또 고전15:58 말씀을 보면, 굳센 신앙을 가지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역사 상 최고 부자 존 D.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년~1937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화폐가치 환산해 보면, 현재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보다 3배의 재산을 소유했다고 평가됩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보면 록펠러를 가리켜 ‘미국의 사업가·대부호·자선가’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자선가와는 거리가 먼 악덕 기업인이고 독점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현재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엑슨모빌의 전신)을 창업하고 석유산업으로 돈을 엄청 벌어들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잘 배웠습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사업을 하다 보니까 신앙보다 세상에 집착했고 나중에는 돈 중독에 빠졌습니다. 돈 벌이를 위해서 편법, 탈법, 불법, 뇌물 등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탐욕스런 악덕 기업주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법적인 제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습니다. 53세 때 불치병에 걸린 겁니다. 탈모증이 와서 머리카락이 완전히 빠져나가 문어머리가 되었고, 불면증에 소화불량까지 겹쳐 하루에 기껏해야 우유 한 잔에 비스킷 하나밖에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몰골이 마치 해골 같이 되었고 죽음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록펠러의 사망 기사를 미리 써놓고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그 때 다행히 하나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한번은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를 지나가는데, 구석에서 병원 당국자와 소녀 환자 모녀가 병원비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그 병원비를 대신 내줍니다. 

그 후 주는 기쁨을 알게 된 록펠러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였고, 적극적으로 자선 사업을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그의 심령에 기쁨이 가득 찼고, 몸도 회복됩니다. 당장 죽는다고 했던 그가 98세까지 장수하게 됩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자선 사업을 벌였는데, 대학교를 무려 12개나 설립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시카고 대학이 그 중 하나입니다. 교회는 4,928개나 지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만일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없이 세상에 중독된 상태로 살다 인생을 마쳤다면 그는 악덕 기업인으로 기억됐을 겁니다. 그가 회심하고 신앙에 심취하게 되었기에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자선가로 기억될 수 있게 된 겁니다. 

여러분, 분명히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재림의 날이 종말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임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각자에게 죽음 순간 즉 개인적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그 날이 닥치기 전에 예수 믿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성하며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결한 삶을 살고, 주의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말세지말을 사는 성도의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외칩니다! 상기하자, 롯의 처! 부디 롯의 처를 반면교사로 삼고 올바른 신앙으로 승리의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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