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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종교개혁 (마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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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종교개혁 (마 12:1-16)

오늘은 교회가 지키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495번째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1517년 신부인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게시한 것이 시작으로 전 유럽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저항하다.’ ‘반대하다.’라는 뜻입니다. 로마 카톨릭 구교의 잘못된 권위주위와 권력주의, 부정과 부패를 박차고 반대해서 새롭게 출범한 교회가 바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이런 개신교들이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세 가지 가졌던 중요한 핵심 모토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하는 세 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로마 카톨릭은 성경 말씀 보다는 전통과 권위 제도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또 로마 카톨릭은 사람들이 업적이나 공로 헌금을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그것은 틀렸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솔라 피데 오직 믿음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또 로마 카톨릭은 자기 의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의로 용서 받는다. 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해서 오직 은혜로 주장을 했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원리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원래 독일 어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아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 당시 수도사들은 고해 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로마 카톨릭은 마찬가지입니다만은 신부에게 가서 보이지 않는 천을 사이에 두고 자기 죄를 고백하면 신부가 용서를 선언하죠. 마틴 루터는 종종 가서 고해 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고해 성사를 할 것이 많아가지고 자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어떨 때에는 6시간씩 가서 고해 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고해 성사를 담당하는 신부님이 귀찮아서 ‘루터야 제발 죄 좀 모아가지고 한꺼번에 오너라.’ 이렇게 했습니다. 너무 자주 오지 말고 좀 모아가지고 와라 보따리 싸 가지고 와라 했다는 것입니다. 

또 주임 담당 신부님인 스타 우피체라고 하는 신부가 이렇게 루터에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께서 너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 말고 살인이나 간음이나 신성 모독과 같은 중대한 일로 나를 찾아와라 이렇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 당시 로마 카톨릭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마틴 루터는 늘 고해 성사를 하고 돌아와도 죄의 의식을 느낍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래서 자꾸 찾아가는 거예요. 아무리 찾아가도 마음의 평화가 없다는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죠. 자 또 그 당시에는 죄의식을 씻기 위해 고행을 했습니다. 금식을 한다든가 자기를 학대한다든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나는 편안하게 침대에 잘 수 있나?!’ 그래서 자기는 일생동안 나무 위에 올라가서 생활을 했습니다. 거기서 먹고 거기서 자고 이것도 하나의 고행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떠나서 일부러 굶주리고 배고프고 어려움을 당하고 이렇게 해서 고행을 많이 해야지 자기 죄를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다 인간적인 의죠. 자기 노력에 의해서 용서 받으려고 하는 그런 인간의 의를 쌓는 거죠. 또 그 당시에 건축 중이었던 성 베드로 대 성당이 있는데 많은 수도사들은 그 성 베드로 대 성당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다는 것이예요. 

그 수백 개의 계단을 기어올라 가고나면 무릎이 다 까져가지고 피가 철철 흘러 납니다. 그 피를 흘릴 때마다 자기들의 죄가 씻음을 받는 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틴루터는 그 성 베드로 대 성당을 무릎으로 꿇고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계속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512년 마틴 루터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그가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합니다. 그런데 강의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로마 카톨릭에서 가르쳤던 것 하고 성경하고 틀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발견하고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은 자신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 자신의 의를 쌓아야 한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행을 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자기 의를 쌓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예요.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교독문에서 읽었던 로마서 1장 10절에 보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을 깨달았죠.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또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이 교황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 성 베드로 대 성당이 아직 완성이 안 됐어요. 왜냐하면 우리 교회 짓는 것 하고 중세의 교회 때 성당을 짓는 것 하고 달라요. 

성당은 보통 크게 지으면 100년, 200년씩 공사가 계속 됩니다. 그래서 일부를 지어 놓고 헌금이 들어오면 또 짓고 또 짓고 하는 거예요. 이 성 베드로 대 성당이 아직 완공이 안 되었어요. 돈이 없어가지고 그래서 그들은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내면 면죄부를 살 수 있고 면죄부를 사면 누군가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돈 많이 내고 면죄부만 사면 죄가 다 용서받아요. 죄를 면해주는 것이 면죄부에요. 

그런데 그것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여러분 이미 부모가 죽어서 죄 때문에 지옥 갔습니까? 부모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십시오. 그럼 부모가 천국으로 옮겨 갈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쳤어요. 이 얼마나 잘못되고 허황된 교리입니까? 그래서 그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는 아주 유명한 연사들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여러분들 들어보세요.하나님과 성 베드로가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구원과 세상을 떠난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들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부모들을 구해 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연보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돈만 있으면 내면 당신의 부모들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다 옮겨 놓을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같은 교리들을 주장하고 또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이건 아니다. 이건 사기다. 이건 틀렸다.’ 그래서 그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항의문, 반박문이라고도 하죠. 또는 공개 토론문이라고도 합니다. 토론 주제를 게시했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면죄부는 단순히 교회적인 처벌에 대해서만 사면할 수 있지 하나님이 부과하신 것은 사면할 수 없다. 면죄부는 죄책감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교황 자신이라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면죄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사면할 수 없다. 그 사면권은 역시 하나님께만 있다.> 

이런 내용으로 95개조의 조항을 담아서 그것을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 본 마틴 루터는 이 일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올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깨달은 한 양심이 있는 한 신부로서 교황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공개 토론 주제를 게시했는데 그 당시 인쇄술이 막 계발이 될 때에요. 그래서 인쇄업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인쇄기를 팔려고 막 복사를 해서 유럽으로 퍼트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게 되어서 오늘날 개신교가 탄생하게 됐죠. 로마 카톨릭을 반대해서 새로 나온 프로테스탄트. 그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이런 개신 교단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1521년 4월 17일 교황은 이 마틴 루터가 너무너무 미워서 보름스 의회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죽을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를 너무나 아끼던 사람들이 그를 은신처로 피신 시켰습니다. 그는 그 은신처에 3개월 동안 있으면서 성경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라틴어라는 것은 신학 박사나 읽을 수 있지 그것은 보통 평민들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쓰지도 않는 언어입니다. 아주 고대어입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 신부들이 하나 가지고 있고 평신도들은 성경이라는 것을 구경을 못해요. 그래서 신부들이 하면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듣는 거예요. 잘못된 것도 듣고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틴 루터가 처음으로 하는 일이 성경을 독일어로 쉽게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3개월 만에 번역 작업이 끝나는데 그것이 9월에 완성이 되어서 9월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부터 성경이 온 독일인들에게 유럽에 번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그들은 깨닫고 종교계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거기에 두 가지를 더 합친다면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 행함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행함, 오직 이웃 사랑이다. 이 다섯 가지의 핵심 가치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 바로 종교 개혁입니다. 

사실 마틴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는 담대하게 자신을 돌보고 또 교황에게 마지막까지 무릎 꿇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칼빙과 츠빙글리에 의해서 종교 개혁은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 교회의 종교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자 그런가 하면 여러분 구약에서도 종교 개혁이 종종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이죠. 역대하 29장 이하에 소개됩니다. 히스기야가 25세에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주 믿음이 돈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보니까 이건 하나님을 잘 못 섬기고 있어요. 

그는 25세 왕위로 등극해서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닫혀 있는 여호와의 성전 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않아요. 문이 닫혀 있고 우상만을 숭배하고 있어요. 성전 문을 엽니다. 그리고 수리하고 성전 정화 작업을 벌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 가증한 것들 다 청소해 버립니다. 제단을 깨끗이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백성이 섬기던 주상, 놋으로 만든 이런 우상, 아세라 목상 이런 것들을 다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에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 예물을 드리고 번제물을 드려서 예배가 드려지게 합니다. 그리고 잃어 버렸던 유월절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이었어요. 

그 이후 역대하 33장에 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두 번째로 소개 됩니다. 이 요시야는 8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31년 동안 남왕국 유다를 통치했는데 아주 훌륭한 왕이었어요. 그는 왕이 되자마자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 태양상들을 다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잘못해가지고 자기들의 아이들을 불에 태워서 몰록신에게 드리는 우상이 있었어요. 그것을 다 금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힐기야 대 제사장을 시켜서 성전 수리를 명령했어요. 하나님의 성전이 너무 쇠퇴했으니까 그것을 좀 수리하자! 수리하다보니까 거기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이 율법책이 성경이거든요. 

그 당시에는 성경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 전에는. 성경이 나오니까 너무 놀래가지고 왕에게 가져왔어요. 왕이 그 성경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들려줍니다. 우리가 이 성경과 너무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으니까 그래서 성경을 다시 찾아서 그것을 읽고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명령했어요. 그리고 유월절을 다시 지키게 한 것이 바로 요시야의 종교 개혁입니다. 

신약에 와서 세 번째로 예수님의 종교개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이후에 성전에 가셔서 거기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십니다. 거기서 비둘기파는 자들, 양 파는 자들, 매매상인들 환전상들 그들을 채찍으로 쳐서 다 내 쫓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을 다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심하게 적용해서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서 장사도 못하게 했어요. 교회에서 왜 물건을 파느냐 못 하게 했어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면 이 백성들이 가져온 것은 흠이 있다고 다 퇴짜를 놓고 그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에게 산 것만 OK하고 사인이 나니까 할 수 없이 거기 와서 억울해도 거기 와서 비싸도 거기 와서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자 이런 부정과 부패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내어 쫓으시고 성전을 정화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종교 개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종교 개혁 정신은 사실은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법 논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당시에 많은 백성들은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다 지킬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안식일에도 목동들은 양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니까 그들은 죄인으로 몰리고 늘 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과시하고 자랑하며 으스댔지만 많은 백성들은 그 법에 저촉되어서 그들은 죄인처럼 일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 안식일 법만 해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미쉬나라고 해서 하나님의 성경 외에 다른 안식일 조항을 많이 만들어 놨는데 39가지를 만들었어요. 안식일에는 몇 킬로미터 이상 걸어가지 못하고 불을 조리해서 음식을 만들어도 안 되고 얼마 이상 들어도 안 되고 이 참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지금도 아주 엄격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이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누르느냐?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누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그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버튼도 못 누릅니다. 일이기 때문에 노동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원래 안식일 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근거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7일 째 쉬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백성들도 온 성도들이 쉬시게 만드셨어요.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일하지 말라. 

주인이 일하지 않으면 누가 쉴 수 있어요? 그 집의 종이 쉴 수 있죠. 그 집의 소나 말이 쉴 수 있죠. 일꾼들이 쉴 수 있어요. 그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모두가 다 자유한 날이고 편히 쉬는 날이고 그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날이다. 이렇게 선포하신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 안식일 법을 너무너무 조항을 많이 만들어서 사람을 옭아매는 아주 무서운 법으로 변질 시키는 거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자 오늘 우리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죠.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아멘 

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제자들이 뭐 하나 보고 있다가 그들이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밀밭에 들어가서 밀 이삭을 몇 개 따가지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어요. 아 그랬더니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따가지고 비벼서 먹었으니 노동행위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거에요. 이 참 답답한 노릇이죠. 

특별히 그들은 이런 법을 적용한 거예요. 자기들이 만든 미쉬나에 이런 것이 있어요. 안식일에는 추수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추수했다는 거예요. 잘랐으니까! 또 탈곡을 하지 못한다. 탈곡기 돌리는 것이 탈곡이죠. 그런데 손으로 비볐다는 것이죠. 그게 탈곡이라는 것이에요. 또 키질을 못한다. 키질을 해서 껍데기를 내 쫓고 알곡만!! 그러니까 입으로 후 불었다는 것이죠. 그게 키질이라는 것이에요. 그래가지고 노동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율법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죠. 신명기 23장 2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너희가 굶주릴 때에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를 마음껏 따 먹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나오지는 말아라.’ 

이 뭐예요? 죽어가는 사람은 옆집에 포도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도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생명이 중요하니까?! 그러나 남의 것을 그릇에 담지 말아라. 그것은 도둑질이니까! 또 너희가 남의 집 이웃 집 곡식밭에 들어가서 너무 배고플 때 손으로 이삭을 따서 먹는 것은 가능하다.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아라. 낫을 대고 쑥 자르면 그것은 도둑질 이예요. 

그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법에도 예외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법은 다 인도주의적인 법이예요. 긍휼의 법이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아주 엄격한 법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혹사 시키고 무거운 짐을 매기고 다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들어서 그것을 반박하십니다.

첫 번째 예는 다윗의 예를 듭니다. 다윗이 그 부하들과 함께 사울 왕에 쫓길 때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 제사장에게 안면이 있으니까 내게 먹을 것을 좀 주십쇼. 그랬더니 아비멜렉 제사장이 우리 성전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 진설병 밖에 없습니다. 진설병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드릴 때 쓰는 떡이거든요. 이것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아비멜렉이 굶주려 가는 다윗과 부하들에게 진설병을 내어 주었어요. 다윗은 그것을 먹고 힘을 내어서 다시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희는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다고 해서 비난한 적이 있느냐? 비난한 적 없어요. 왜? 자기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이니까 감히 다윗에게는 말을 못합니다. 위대한 조상이거든요. 

그런데 너희는 나와 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고파서 밀 이삭을 따먹었다고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 다윗은 제사장이외는 먹으면 안 되는 진설병, 거룩한 떡에 손을 대고 그것을 먹었는데 너희는 그것을 비판하지 않지 않느냐?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얼마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한 것인가를 예수님이 정곡을 찔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귀에 갖다 붙이면 귀걸이 코에 갖다 붙이면 코걸이 이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또 두 번째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제사장은 성전에서 일을 해도 그것은 안식일 법에 저촉되지 않지 않느냐? 그렇죠. 안식일 날도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안식일에도 일을 합니다. 제사 드리기 위해서 양도 잡고 일을 합니다. 그것은 안식일 법에 해당이 안 됩니다.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바로 성전보다 크신 이가 여기 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이에요. 나에게는 안식일 법이 해당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안식일에 주인이니까!! 내가 안식일을 정했는데 누가 나에게 안식일 법을 저촉하고 비판하고 있느냐? 그런 얘기예요. 거기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 오늘 우리 성경 7절과 8절을 같이 읽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이 7절 말씀에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구약의 말씀이에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십니다. 자 제사냐? 자비냐? 물론 제사,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제사라고 하죠. 제사 드리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사는 당연히 드려야 되고 또 경건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비라는 것이 뭐에요. 긍휼을 베푸는 것이에요. 굶주린 자, 죽어가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자비예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자비에요. 그것은 제사보다 더 우선되고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습니다. 유대인이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아이고!! 도망가 버립니다. 왜? 거기 손을 대었다가 피가 묻으면 내가 부정하게 되고 내가 제사를 집례하지 못해. 제사를 못 드릴까봐 도망가 버렸어요.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치료해주고 그를 싸매주고 여관까지 안내해 주었어요. 이중에 누가 네 이웃이 되겠느냐? 너희도 그와 같이 하라. 제사를 위해서 제사장 레위인처럼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말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내라. 치료해 주어라. 그것이 바로 자비의 법이에요. 주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그렇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이고 자비의 정신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가 중요하지만 예배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 한 가지 예를 드십니다. 이 사건을 행하시는데 회당에 마침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어떤 손 마른 사람이 거기 회당에 들어왔어요.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안식일 법에 저촉되지 않습니까?’ 하고 예수님을 시험했어요. 예수님이 고칠 줄을 아니까 미리 엄포를 놓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아십니다. 손 마른 사람이라는 것은 손이 말라서 피가 통하지 않아서 신경이 없어서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예요. 

예수님은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그 다음 날까지 그냥 두겠느냐? 안식일에 빠졌다고 그냥 두겠느냐? 건져내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안식일에 저를 건져 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얘기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이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미니까 즉시로 깨끗하게 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화가 나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죽일고’ 의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어떻게 죽일까를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요? 어떻게 사람을 살릴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절망한 자를 일으키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생명 잃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까?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에요. 여러분 오늘 한국 교회의 관심이 여기에 있어야 해요. ‘나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노라.’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가운데 ‘두 노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예핌과 에리세이라는 두 노인이 평생 돈을 벌어가지고 둘이 성지 순례를 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배를 타고도 가기 때문에 보통 1년 가는 거리예요. 그래 돈을 모아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가다가 서로 사정이 생겨서 헤어지게 됐어요. 이 예핌이라는 부자 노인이 먼저 가고 에리세이라는 평범한 중산층의 노인이 뒤에 떨어졌어요. 가다가 목이 말라서 어느 초가에 들어가서 물을 좀 얻어먹으려고 들어갔더니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들어가 봤더니 병들어서 들어 누워 있는데 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어요. 

아! 이분을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물을 떠다가 먹이고 자기가 시내 가서 빵을 사다가 그들을 먹입니다. 기력을 조금 회복해요. 다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가면 죽을 거 같아요. 그래서 자기가 시내 나가서 이 쟁기를 사오고 말과 소를 구입을 해서 이들에게 주고 갑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고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해주고 떠나려니까 이제는 노자 돈을 다 써버렸어요. 그것을 사느라구요. 이제는 갈 수가 없어요. 배도 타고 숙박비도 내야하는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에리세이는 그냥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예핌이라는 부자 노인은 혼자 예루살렘까지 갔어요. 

이 에리세이가 언제 오나 기다렸어요. 아 그러고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밑에 관이 있죠. 무덤. 그 앞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얼핏 보는데 저 앞에 에리세이 노인이 그 앞에 가서 앉아 있는 거에요. 아니 저 노인네가 언제 나보다 빨리 왔나 이상하다. 끝나고 만나려고 가보니까 사라져 버렸어요. 몇 번 그런 경험을 했어요. 아니 이 노인네가 어디 갔나? 분명히 에리세이가 맞는데 나보다 빨리 왔네. 이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1년 지나서 돌아왔더니 아 에리세이는 성지 순례를 오지도 않고 이미 와 있는 거예요. 그 때 이 예핌이라는 부자 노인은 깨닫습니다. 

아 에리세이는 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였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예루살렘 성전에 나보다 먼저 이끌어 내서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고 나는 이제 그 뒤에 가서 예배했구나 하고 깨닫죠. 오늘 톨스토이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제사보다 자비가 더 중요하다. 성지 순례 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이 에리세이가 하나님 앞에 더 인정을 받고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주님은 오늘날 말씀하십니다. 나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노라. 긍휼과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책을 읽다 보니까 재미있는 참 귀한 간증이 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안요한 목사님이라고 새 빛 교회를 개척하시고 시각 장애인인데 목사님이시죠. 이분이 어릴 때 아버지가 시골에서 목회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는 어렸을 적부터 사춘기 때부터 늘 교회에 대한 반항심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 벽에 이렇게 써 놨어요.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으라. 

요한복음 1장 1절’ 그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 그러면서 성장을 했는데 외국어 대학교를 나와서 영어 교사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칩니다. 아주 훌륭한 교사예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시력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눈이 안 보인다면 쫓겨나니까 영어 책을 다 외워 버렸어요. 그리고는 안 보고 보는 척을 했어요. 나중에는 발각이 되고 그는 교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아내도 아이들 데리고 다 떠나갑니다. 홀로 남았어요. 그 때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아주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갈 데가 없으니까 구두 닦는 애들하고 같이 어울립니다. 그들이 먹여주고 데리고 다니고 구두도 닦고 그렇게 생활을 해요. 그래서 자기 처지가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이런 사명을 가지고 미국에 있는 자선 단체에 극동방송을 통해서 편지를 썼어요. 제가 공부하고 싶은데 시각 장애인이고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등록금이 없습니다. 생활비도 없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미국의 자선 단체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국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면 우리가 등록금 대주고 생활비를 대 주겠다. 그래서 신학교를 가려고 여기 저기 서울에 있는 유명한 신학교를 다 두드렸어요. 저를 좀 받아달라고 했더니 다 거절당했어요. 당신 같은 시각 장애인은 우리 신학교에 올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오기 어려운데 어떻게 당신 같은 시각 장애인이 올 수 있겠습니까? 다 거절했어요. 마지막은 너무 낙심했어요. 

어느 추운 겨울 날 마지막 방문한 신학교가 수유리에 있는 어느 신학교였어요. 그가 교무실을 물어물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따뜻한 난로의 온기가 느껴졌어요. 그랬더니 누군가가 자기 손을 꽉 잡아 주었어요. ‘안 선생님 잘 오셨어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대요. 자기는 일생 일대 이 손이 분명히 예수님의 손일거야 그러니 나도 이제 목사가 되면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는 목사가 될거야 이렇게 결심을 했더랍니다. 그리고 그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어요. 그 신학교가 어떤 신학교인줄 아시죠?! 제가 졸업한 신학교입니다. 한국 신학대학!! 그 유명한 그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졸업을 해서 지금은 우리 기장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에 가서 목사가 됐지만 그분이 거기서 공부를 했어요. 

여러분 오늘 저는 종교 개혁 주일이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비판 받는 것 많죠. 목사직이 너무 권위주의자가 되었다. 장로직이 명예직이 되었다. 뭐 이런 저런 얘기들이 많죠. 목회자의 윤리 문제, 교회 재정의 사용 문제, 뭐 성전 건축 많습니다. 물론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제사보다 자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정말 외로운 사람들 절망적인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어느 샌가 우리 한국 교회가 역사가 100년이 넘으면서 이젠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 대통령의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싫어하게 되었어요. 왜? 대통령이 나가는 교회. 이 교회가 자꾸 기득권층만 주장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교회는 다시 낮은 데로 내려와야 해요. 가난한 자들 눈물 흘리는 자들 소외된 자들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해요.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앞으로 한국 교회의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우리 영신 교회가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외로운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고 소외된 사람들의 형제가 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형제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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