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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헛된 욕심의 결국 (약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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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욕심의 결국 (약 1:12-18)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가 학교를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안교회에서 작지 않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 그 돈으로 학교를 짓고 학교와 교회를 함께 하면 좋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시작하고 학교를 건축할 힘이 우선은 없으니 학교를 빌려서 교회를 시작하였고, 지금 높은 뜻 광성교회, 높은 뜻 정의교회, 높은 뜻 푸른 교회가 모두 다 학교를 빌려서 교회를 하고 있으니 학교와 교회를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꿈이 결국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천안에 학교를 할 수 있을 만한 땅이 생겨서 결국 그곳에 학교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함께 시작할 교회를 먼저 개척하여 작년 3월부터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법 좋은 교회가 되어 2014년 3월 개교를 하게 되면 학교 뒷바라지를 제법 잘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오래 전 학교를 생각할 때 교회가 학교를 잘 지원하여 운영을 할 때 좋은 교사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학교보다 봉급도 더 많이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보다 먼저 학교를 세워 아주 좋은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던 분이 저에게 ‘그러면 정말 좋은 선생님을 모실 수 없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보수가 너무 좋으면 소명감 때문에 오는 선생님인지 좋은 보수가 욕심이 나서 오는 선생님인지를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말이 참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자랐던 청량리 중앙교회는 작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재정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임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첫 주일 들어오는 헌금으로 담임목사 생활비 주고, 두 번째 주일 들어오는 헌금으로 여전도사님과 사찰 월급 주고 그리고 나머지 헌금으로 교회운영하면 참 좋겠는데.... 당시 교회는 그만큼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작지 않은 저희 교회가 그랬으니 저희보다 더 작은 교회들의 형편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71년도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20명이 정원이었는데 입학시험에 응시한 학생의 수는 12명이었습니다. 당연히 전원 합격이었습니다.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평생 가난을 각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력은 몰라도 소명감이 없이는 신학교에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임 목사님은 늘 가난하셨습니다. 여유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목사님 사모님이 저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난 가난이 싫어.” 뼈가 아프리만큼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은 참 장부 같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섭진 않아, 또 다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뭐 그렇게 살지 뭐.”

저는 목사인데 가난하지 않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억대 연봉 논란에 휩쓸려 고생했습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크게 억울하지는 않았습니다. 억대 연봉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가난하게 산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82년도부터 자가용을 타고 다녔습니다. 당시는 자가용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제법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운전을 대신 해 주는 집사님도 있고, 제 모든 일정과 일을 대신해 주는 비서도 있습니다. 목회비가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과 만나서 식사를 해도 제가 식사비를 지불할 수 있고, 이런 저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어렵고, 목회자들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꽤 많은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독립을 하고 목회자 대우도 만만치 않아 어느 정도 교회가 크면 목회자의 생활이 세상적으로 비교해도 괜찮은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목사는 직업적으로도 괜찮은 직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요즘 신학대학 입학이 몇 대 일씩 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요즘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소명감이 없다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그럴 위험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어지고 물론 아직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큰 교회의 담임목사는 세상적인 어떤 직업 못지않게 누리는 것이 많아지면서부터 교회는 오히려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이 교회와 우리 목회자들에게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은 소명을 가장한 야망에 속기 시작했습니다. 끝까지 충성한다고 은퇴 후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원로, 공로, 명예, 은퇴 타이틀을 부치고 자리를 보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그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을 자행하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300년 이상을 무서운 핍박을 견뎌야만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난하고 약한 교회였지만 교회는 오히려 그때가 강하고 힘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그 엄청난 환난과 핍박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재정적으로 부요해져서 상상도 가지 않은 엄청난 큰 성전들을 지으며 사제들과 교황의 권력이 세상을 능가하게 되었을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중세의 그 타락한 교회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것 같아 얼마나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영적 권위를 상실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개독교라고 불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이런 시험을 받는 까닭이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아멘.

요즘 우리 한국교회는 세습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세습은 제 아무리 변명을 하고 합리화하여도 욕심이 잉태하여 낳은 죄입니다. 교회 세습이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에서 주로 일어나지 않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어느 신학자 한 분이 세습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아주 잘 정리된 글을 발표하셨기에 제 페이스 북에 소개하면서 꼭 정독을 하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댓글에 왜 그런 글을 읽어야만 하는지 자기는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댓글을 읽으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애써 입증하고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 저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무너질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은 많은 매력적인 것들을 누리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교회적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재단의 일이 커져서 그 크고 영향력 있는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것이 주는 매력은 쉽게 무시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교단이 법으로 정해 준 70살까지 이런 것들을 누리고, 은퇴 후에도 원로목사가 되어 손 떼지 않고 계속 영향력을 끼치며, 그 자리를 마침 우리 막내가 신학을 했으니 물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들은 교회를 맡아서 하고 저는 은퇴 후에도 그냥 재단을 맡아서하면 죽을 때까지 힘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다가 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다 죕니다. 죄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 죄는 교회를 무너트리게 될 것이고 저 자신과 제 자식을 무너트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저는 영원한 세계를 믿습니다. 저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가 세상에서 욕심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원로와 세습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습니다. 아주 단순한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하나는 지옥 때문이고 또 하나는 천국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별것 아닌 욕심 때문에 잃어버릴 천국이 너무 아깝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에 들어가 사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 무섭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아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누릴 수 있는 호사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정말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거기에 빠지면 죽습니다. 망합니다. 

정말 좋은 은사와 선물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욕심이 없어서 욕심을 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욕심이 나서 욕심을 버리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세상에서 세상적으로 남보다 좀 더 잘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장사꾼과 같다. 그런 진주를 발견하며 그 또한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좋은 은사와 선물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욕심에 눈 어두워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 중의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30대 말 당뇨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제 몸무게가 지금보다 최소한 7Kg 정도 더 나갔었습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제법 날씬해 진 겁니다. 그래도 의사는 지금보다도 더 체중을 줄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욕심은 비만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나쁘게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만일 몸무게를 빼는 것이 좋다고 너무 무리를 하여 체중이 50kg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다면 의사는 저에게 무엇을 먹으라, 몸무게를 좀 늘리라고 권면할 겁니다.

저는 돈과 명예와 권세가 마치 몸무게 같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를 늘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가 나를 정말 건강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합니다.
언제나 지나치다 싶으면 빼야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저는 매일매일 아침 저울에 올라가 몸무게를 잽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제법 성능이 좋은 전자저울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저는 목사인데 제가 필요한 것보다 좀 더 많은 돈이 생깁니다. 그 돈을 제 욕심으로 다 쓴다면 지금보다 더 세상적으로 근사하게 살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좀 더 좋은 집에서,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좀 더 우아하게 살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나에게 적당한 지출이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려고 나름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도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재산과 저축이 늘어나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늘 조정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정신적이고 영적인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저축과 재산이 있으면 될까를 생각하고 그 이상이 되면 포기하려고 노력합니다.

욕심에 이끌리게 되면 저도 미혹을 받게 되고 그 미혹에 빠지게 되면 결국 욕심이 자라 죄가 되고 그 죄가 자라 저를 사망의 자리로 인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하신 어느 대형교회 원로목사께서 세습을 반대하는 것을 시기심 때문이라고 빗대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누리고 사시는 분이신 것은 잘 알겠지만 저는 정말 그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시기라니 정말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세상에 시기할 것이 없어서 초라하고 죽고 망할 것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리석어 지게 됩니다. 바보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그러다보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위엣 것을 사모하고 부러워해야만 합니다. 보다 좋은 은사와 선물을 욕심 낼 줄 알아야 합니다. 헛된 욕심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어제 텔레비전에서는 고도비만 환자들에 대한 방송이 있었습니다. 고도비만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저들을 위절제술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영적인 위절제술이 필요한 고도비만환자들입니다.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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