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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은혜가 족하도다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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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은혜가 족하도다 (고후 12:7-10)


시인 미즈노 겐죠(水野源三)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성 소아마비를 앓아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오직 눈뿐이었습니다. 울어도 자신의 눈물을 닦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죽기를 원했지만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야오 목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모습이 밝아져갔습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 못하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 눈을 감으라고 주문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일본 문자판을 하나씩 짚어 가면, 원하는 자음과 모음에서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런 엄청난 작업을 통하여 말로 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세계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 깜빡임을 통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겐죠는 ‘괴롭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한 것처럼 불평을 일삼으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없는 것이나 잃어버린 약한 점만 찾지 말고 장점을 헤아리며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시로 인해 약함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신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 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에게 큰 고통이었던 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고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말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의 수동태입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족한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에 오히려 만족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약함은 바울에게 가시가 아니라 보배처럼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괴롭혔던 가시가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함은 바울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깨달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주셨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응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약함이 온전해지리니

거듭남 (Born again)의 저자 찰스 콜슨 (Charles Colson)의 말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세상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성공과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리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았을 때 비로소 나는 감옥이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콜슨이 누구입니까?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보좌관으로 영화와 공명을 누렸으나 정치적 스캔들에 걸려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회개하고 변화되어 감옥에서 나온 그는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련의 고통들이 가시가 되었으나 그 약함을 통해 교만과 자기 우상화가 깨어져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가시만 보고 원망하며 불평해 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혜이며 온전한 자아로 나아가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심히 약하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크게 하십니다. 여기의 ‘온전하여진다’ 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가시를 아픔이라 하지 않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스스로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만약 바울이 약하지 않았더라면 계시를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시를 하나님의은혜로라 고백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혹 부끄러운 약한 점이 있습니까? 약함을 고백할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계시를 주사 온전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함이야말로 온전하게 만드는 은혜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약함을 자랑케되리니

용혜원 목사의 ‘약함의 향기’ 라는 시입니다.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엔 뒤차가 보이지 않은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보지 못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자꾸 깨닫습니다. 아무리 잘 살고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인 것 같아도 가까이 가보면 다 결점이 있고 편견이 있으며 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내가 완벽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장이 강하고 용서가 힘들며 실수를 못 참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우리는 내게도 약점이 있음을 깨닫고 남의 약점을 이해하게 되고 남의 실수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와 약점과 결점이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고 향기인 것까지 눈치 채게 됩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가시를 가졌음에도 기뻐하였습니다. 도리어 약한 것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머문다’ 는 말은 ‘에피스게노세’ 로서 ‘장막을 펴고 함께 산다” 는 의미입니다. 즉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약함을 드러내면 치명적인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약함은 숨겨야 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약함을 극복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결코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약함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약함이 자랑거리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 배가 암초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암초를 치우시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불어나게 하시사 암초를 넘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때 불어나는 강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로 자랑하게 만드는 은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약함이 강하여지리니

나이가 든 소금장수와 젊은 소금장수가 소금을 팔기 위해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다 너무 힘들어 젊은 소금장수가 불평하며 말합니다. “이 산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자 나이 든 소금장수가 말합니다. “나는 이 산이 지금보다 갑절만 더 높았으면 좋겠는걸” 그러자 젊은 소금장수가 의아히 여기며 묻습니다. “어르신도 힘들어 쩔쩔매면서 산이 더 높았으면 좋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 나이가 든 소금장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이 더 높아야 산 너머 사람들이 소금 구하기가 더 어려워져 우리가 가져가는 소금 값을 더 쳐 줄 것이 아니겠는가?”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기쁨이 됨은 약할 때가 강할 때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약함을 가진 바울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강함의 비결은 약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약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강한 사람에게는 그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며 어려운 일과 약점이 생겨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도리어 약함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정채봉 동화작가의 글입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 콩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는 방안에서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 상에 올라 반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콩이지만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지만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약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함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경제적인 약함, 환경적인 약함, 인간관계의 약함이 있습니까? 약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약함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약할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 맡길 기회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온전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자랑이 되는 은혜입니다. 강함이 되는 은혜이기에 약함 속에서도 내게 주신 은혜의 족함을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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