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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받고 싶은 아버지 (시 116:5-8,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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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은 아버지 (시 116:5-8, 눅 15:25-32)
  

본문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성경에 나오는 비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탕자가 집을 나가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탕자의 모습을 그릴 때 자신 안에 있는 탕자를 그림으로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 탕자적인 기질이 숨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이 기질이 늘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크게 꿈틀거리면 집을 나가게 되고 나가지 않으면 방황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 훌훌 털고 나가고 싶어지고 떠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탕자적 기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예수께서 잃은 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잃은 자는 그 당시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일컫고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너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큰 아들은 먼저 믿은 사람들이고 오늘 나를 가리키는 비유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탕자의 비유를 몇 장면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집을 떠나는 탕자

첫째 장면은 집을 떠나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뜻에 순종하고 아버지 농사일을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매일 놀기를 좋아하였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일찍 달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당시 문화로 보면 이런 태도는 매우 불손한 태도로서 이런 태도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석되어 매질 할 수도 있고 율법에 따르면(신 21:18-21) 공개처형도 가능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말하지 않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그때 문서를 썼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문서에 사인을 합니다. 상상해 볼 때 문 밖에는 이미 말이 준비되어 있고 마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지금 문서에 사인하느라 분주하고 지금 탕자의 마음은 이미 먼 나라로 떠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몹시 들떠 있습니다. 그때 큰 아들은 동생이 지금 사인하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고만 있습니다. 

아버지는 초라해진 모습으로 작은 아들이 사인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만 있습니다. 그때 큰 아들은 동생의 그런 행동에 상관도 하지 않고 동생을 말리지도 않았고 마음 같아서는 동생을 붙잡고 귀싸대기라도 때려서라도 붙잡아 놓아야 하는데 형은 먼발치서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큰 아들은 동생을 말리지 않았을까요. 왜 이 싸가지 없는 동생을 말리지 않고 아버지가 저렇게 초죽음이 되어서 초라하게 동생이 사인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말리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요.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이 생략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석자는 그때 아버지는 장남에게 재산의 2/3를 주었고 작은 아들에게 1/3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 최대로 덕을 본 사람은 누구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큰 아들입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이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말리지 않고 방치했습니다. 형은 의도적으로 동생이 하는 짓을 방치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 큰 아들은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게 된 것입니다. 형은 동생 때문에 일찍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이 두 형제 중 누가 더 불량스럽습니까. 그래서 작은 아들을 노골적인 탕자라고 부르고 큰 아들을 음탕한 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재산을 받아가지고 의기양양해서 말을 타고 떠나갑니다. 작은 아들은 환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달렸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말에 오를 때 아버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라져 가는 작은 아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애써서 슬픔을 감추느라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에도 큰 아들은 떠나는 동생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창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쳐다만 보았을 것입니다. 이 음흉한 탕자는 동생이 떠나는 일에도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탕자 이야기에서 보이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아들 중 누구입니까. 집에 있는 아들입니까 집을 떠나는 아들입니까. 여러분은 이 두 아들 중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더 나쁜 아들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 떠나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내안에 탕자적 기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방탕하는 아들 

멀리 떠난 탕자는 아버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갔습니다. 갈 때는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때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재산은 모으기는 어렵고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물질은 탕진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 재산이 얼마 갔겠습니까. 그래서 부자 3년 못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탕진되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인심은 사납습니다. 돈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여오지만 그런데 돈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의기양양하던 아들은 돼지 치는 집에 붙여 살며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고 연명을 합니다. 그 모습이 아주 초췌했을 것입니다. 호기에 차 있던 웃음은 간 데 없고 꿈도 미래도 의기도 다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집을 떠나면 아주 좋을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부모 울타리를 벗어나면 자유로울 줄 압니다. 내가 재산을 일찍 물려받으면 수년 내 갑절로 불릴 것 같이 생각도 합니다. 내가 사업을 하면 부모처럼 쩨쩨하게 하지 않고 크게 잘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젊은이들 마음속에는 이 탕자 같은 마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부모 곁을 벗어나려고 안달입니다. 빨리 재산을 상속받으려고 안달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모두 이 탕자의 기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적당한 통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이 탕자적 기질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이고 그리고 오늘 현대인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다 하나님 품을 벗어나려고 안달입니다. 그 품을 벗어나기만 하면 뭔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 벗어나려고 안달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그런 오늘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벗어나 보니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가를 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어느 날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하고 생각을 합니다. 가서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지었으니 이제는 아들이 아니고 품꾼중 하나로 써 달라고 하자(18-19)”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참회가 아닙니다. 이 참회에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지금은 불황기입니다. 경기가 침체 중에 있습니다. 흉년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 집에도 불황이 겹쳐 일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꾼들은 많습니다. 거기에 탕자까지 들어가면 또 지출이 늘어날 것이 뻔합니다. 지금 아버지에게 무능한 품꾼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집으로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참회 때문에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살 수가 없으니까 할 수 없어서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마침내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동안 아들 때문에 병을 얻어 발자국도 옮기지 못했던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으로 아들을 쫒아나가 맞이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뛰어 나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이고 그것이 부모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막 뛰어 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갑니다. 집나간 아들에 대해서 그동안 괘씸하게 생각도 했지만 막상 아들이 돌아오니까 그 서운한 생각이 다 사라지고 막 달려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큰 아들 모습 

다음은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여기 큰 아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큰 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풍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웬 풍악소리냐고 물으니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형은 그 순간 뛰어 들어가 돌아온 동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동안 밤잠을 설치시던 아버지가 이제야 안심하시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달려 들어가 동생을 맞이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큰 아들은 불평을 토로합니다. “나는 죽도록 고생해도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았는데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배설하다니.” 그 말이 맞기는 맞습니다. 

그래서 이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먼발치서 쳐다보았습니다. 동생 모습을 보니 그동안 고생 때문에 그런지 얼굴이 폭삭 늙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모습은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옷은 누더기였고 신발은 낡은 한 짝만 신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생해서 머리는 거의 다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큰아들은 이래저래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여기 두 아들 중 질이 아주 안 좋은 탕자는 누구입니까. 큰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여기서 성경은 나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큰 아들인가 작은 아들인가“ 작은 아들은 집을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회개하고 눈물짓고 뉘우치고 죄송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오건 말건 시큰둥하게 생각하고 잔치에 불평을 하고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돌고 있습니다. 

여기 이 형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인가?”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먼저 온 신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도대체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하고 요란하게 영접을 하면 먼저 온 신자들은 “왜들 저러나, 우리는 챙기지도 않고 새신자들만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한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큰 아들 당신의 모습입니다. 

20여 년 전에 새신자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때 먼저 온 여러분들은 그들을 향해서 시큰둥했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공간은 비좁고 새신자는 들어와 예배 후에 영접을 해야 하는데 권사회에서는 자기들이 월례회를 해야 하는 공간에서 새신자들 영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빨리 나가라고 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교회가 새신자 교회가 되어버렸느냐고 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새로 온 성도들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애착이 없습니다. 개념이 없습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 왔으면 연민의 정으로 마음에 불이 붙어 달려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큰 형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돌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이런 현상이 교회들 마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새신자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여기 큰 아들은 누구인가 그것이 내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슬퍼하시는 아버지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밤낮 기다렸던 그 아들이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쁨보다 마음의 슬픔이 더 컸습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큰 아들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으나 오늘은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뭐냐”하고 불평을 합니다.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한 나에게 염소 한 마리 잡아 주었느냐”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이 큰 아들은 집나갔던 동생이 돌아왔는데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 큰 아들 때문에 속이 상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반목할 때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버지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슬퍼하십니다. 

또 하나는 외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오늘 참회하고 돌아왔으나 늙은 아버지는 마음이 슬픕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외로움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어머니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 둘이 속을 썩이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홀로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탕자 아버지는 마음이 외롭고 쓸쓸하고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도 사랑받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로부터 비애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사랑했으나 아들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게 울고 슬퍼하고 눈물짓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사랑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여기 슬퍼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으나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도 성도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이것이 서글픈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사고를 칩니다. 

이미 6-7번 경찰서를 드나들었습니다. 한번만 더 사고 치면 이번에는 교도소에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걱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물건을 훔치고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면회 온 아들에게 너는 제발 똑바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고 소리치고 도망 나와 방탕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네 아버지가 정말 물건을 훔친 줄 아느냐, 네가 한 번 더 경찰서에 들어가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니 너에게 교도소가 뭔지 알게 하려고 일부러 물건을 훔치고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신 거란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 탕자가 집으로 들어가듯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사랑하면서도 슬픈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사랑했으면서도 외로우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너무 완벽하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전도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큰 일입니다. 전도는 한사람 자리를 채우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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