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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길에서의 교훈 (출 13: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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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길에서의 교훈 (출 13:17-20)


예수를 믿는 것이 제일 재미가 있었던 때는 아마도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그때 우리는 예수 믿는 재미가 철철 넘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소위 첫사랑의 계절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이 꿀맛 같고, 기도의 응답이 척척 오고, 찬양이 너무 좋고, 예배의 시간 시간이 감격이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때가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지루해질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그때부터 내 영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가리켜서 우리의 선배들은 그것이 바로 광야 길의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1500년대 후반에 살았던 영성의 깊은 샘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이라고 불리웠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가리켜서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들의 신앙 여정 가운데서 어느 날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길의 체험입니다.  이런 광야 길의 체험은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가령, 당장 이루어질 것 같은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차가운 벽 앞에서 절망을 느껴야 하는 때, 이것도 일종의 광야 길의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었던 하나됨으로 시작되었던 우리들의 사랑의 관계, 혹은 우정 관계가 어느 날 하찮은 일로 말미암아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관계가 멀어지고 나중에는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때, 이것도 우리의 광야 길에서의 한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그 날은 그들이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었던 최대의 감격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지긋지긋한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멋지고 당당하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차갑고도 살벌한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그들이 광야에 들어섰을 때에는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애굽에서 떠나 시나이반도를 거쳐서 팔레스타인 땅에 도달하는 길은 그렇게 멀고 험한 길은 아닙니다.  광야를 가로질러 직선으로 해서 쉼 없이 그 길을 걸어간다면 거리가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40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길은 직선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험한 광야 길을 따라 40일의 거리가 40년의 거리가 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7절을 보면, 그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그 길은 가깝고 쉬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여기에 보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홍해 쪽 먼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40년의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해의 광야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야만 했던 광야 길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을 허락하신 의미와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광야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리시고 고생시키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잔인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 17절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인도하신다면 거의 직선으로 쉽고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피하여 먼 길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선으로 길을 가게 되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리고 있는 어떤 적들이 있었음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반드시 전쟁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굽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주 쉬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을 하나님은 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마음의 유혹을 차단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래 인도하시고자 했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다른 방향의 길로 예비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남쪽으로 돌아가는 홍해 길에도 후에 전쟁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첫 번째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기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애굽을 떠날 때 그들에게는 아직도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만약에 처음부터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쉽게 애굽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하나님은 보시고 계셨습니다.  솔직히 이것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본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힘들고 어려운 길보다 쉽고 편안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길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준비하신 길이라고 할지라도 험한 고난의 길이라면 쉽게 포기하고 싶은 유혹 앞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그 순간 전쟁을 경험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아직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하나님을 소개할 때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될 때를 기다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배워야 할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때때로 내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닌 아주 멀고 험난한 돌아가는 길로 느껴질 때 "이 길을 내가 왜 걸어야 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돌아가야 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우리가 믿어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길이 먼 길로, 험한 길로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이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훨씬 다른 마음의 자세로 이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 길은 그분이 예비하신 사랑의 길이라고."  이 길을 지나감이 내 마음에 너무 아프거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 아픔도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가 출산하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말하듯 "이것은 아기를 위한 사랑의 길이야, 이것은 내 인생에 진정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기 위한 사랑의 수고야."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고통을 사랑의 특권과 수고로 받아들이는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 끝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주님은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어떤 광야의 외롭고 힘든 길도 사랑으로 예비된 길인 것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광야 길은 훈련을 위해서 준비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본문 17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을 돌이켜"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change their minds"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변할까 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가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굽을 떠난 이상 그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획하셨던 가나안 땅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계획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판단하신 최선의 길을 백성들로 하여금 걷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보다 분명하게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로 하여금 요셉의 유골을 메고 광야의 길을 행진하게 하십니다.  본문 1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우리가 잘 알 듯이 요셉은 자기의 나라가 아닌 외국의 땅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나라에서 국무총리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존심이고, 긍지였습니다.  그 요셉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애굽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있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욕망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유골을 볼 때마다 너희들은 내가 성공한 이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시온으로 가야 존재들임을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합니다.  "내 유골을 메고 광야의 길을 행진하라."

저는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삶의 경험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으로든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 길에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의 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40년이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이런 인상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있던 애굽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

애굽은 세속성의 대표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문화적인 표징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그들 안에 있는 애굽을 빼내는데는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40년 광야의 훈련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애굽이라는 세속성을 빼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욕정과 그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약속하신 시온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애굽을 빼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애굽을 들먹였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꾸만 세상의 즐거움과 오락을 교회 속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유쾌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때 우리는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재미가 없다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세상이 주는 그 재미를 기대하면서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구원받은 그 감격을 감사하며 예배하는 가운데 보다 구체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나오는 곳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애굽이라는 세상적인 것들을 빼내지 않는다면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길에서 계속해서 훈련을 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과 시간은 점점 더 길어져만 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우리 안에 있는 애굽이라는 세속적인 것들을 빼내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데서 넘어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훈련의 시간들을 길게 하고 짧게 하고는 여러분의 의지적 삶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화를 위한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빨리 결과를 보려고 합니다.  은혜도 단 번에 다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화의 과정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단 번에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결코 단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 휴대폰으로 전화가 잘못 걸려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 바로 걸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몇 번에 거셨습니까?"  그랬더니 상대편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한 번에 걸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나갑니다.  누구나 고난의 시간은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이라는 보다 긴 광야의 체험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인생 길을 걸어가는 사람 치고 광야를 지나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 앞에 나가서 내 백성을 보내달라고 허락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흘쯤 길을 나가서 광야에서 여호와께 희생의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희생의 제사는 오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그들이 예배하면서 걷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배는 언제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어디서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가장 적합한 상황은 바로 광야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고독한 광야를 지나고 있다고 느끼신다면 사람의 아무런 방해가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나를 향해 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가 내가 오해의 광야를 지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야의 바람소리에 내 기도를 띄워드림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너무 고통스러운 광야를 지나고 있다고 느낄 때 광야의 밤에 서늘한 바람 속에 내 모든 피곤함을 씻겨 주시는 산들바람의 치유를 맛보며 치유의 주님을 경험하는 광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훈련받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이 광야에서 주님을 예배하며, 이 광야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주님의 뜻에 적합한 사람이 될 때 광야 길은 분명히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걸을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길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훈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광야 길은 성령으로 인도된 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고난을 만났을 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때에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에라도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나를 결코 이 고난 속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곁에 오셔서 이 고난 속에서 반드시 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고 빠른 직선의 지름길을 가게 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40일이 왜 40년이 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했던 한 가지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광야 길을 출발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21절의 말씀입니다.  2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여기에 보면 "인도하시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광야 길에서의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들을 인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광야 길에서의 40년, 그 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훈련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으로 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우리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을 신실하게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인도하심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그 인도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구름기둥이 북동쪽으로 움직여 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구름기둥은 남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결코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광야의 길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타난 구름기둥,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싫어도 그 길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왕에 따라가야 할 길이라면 기쁨으로 따라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앞의 여정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 날 그들은 약속의 땅 앞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아이들은 조금만 가면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도 멀었어요?  몇 분을 더 가야 해요?"라고 끊임없이 물어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철이 들고 성숙해지면서 더 이상 그 질문을 묻지 않습니다.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성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는 성숙입니다.  우리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통과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또 얼마나 빨리 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기대는 이것입니다.  이 모든 인생의 길을 통과했을 때 주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설 수가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 광야의 길을 통과하고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사람으로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40년의 광야 길, 그 길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셔야만 했던 충분한 하나님의 성숙의 시간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직도 나에게서 광야의 길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성숙의 과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광야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숙의 과제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갑고 힘든 광야의 길이라고 해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만약 이 길이 사랑으로 예비된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배하면서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워하면서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도 기뻐하면서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구름기둥,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먼 앞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앞의 길은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0년 후의 계획까지 보여주지는 않으시겠지만 오늘 내가 해야 할 길은 보여주십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늘을 걷고, 내일을 걷다 보면 마침내 나를 인도하시는 그 지점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모습으로 나는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 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 해"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길은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광야 길이 차갑고 험하지만 그 속에서 예배하는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면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접을 받는 광야 인생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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