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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을 즐거워하는 성도들 (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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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즐거워하는 성도들 (롬 5:1-11)

 
오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누리는 복에 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말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인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리 모든 사람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선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인 율법에 비추어보면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12절에 이르기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3)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율법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세상 법정에 가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앞에 두고, 치열한 법적 싸움을 벌입니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듣고서 사건을 심리하여 법이 정한 대로 적정한 형벌을 내립니다. 이 때, 살의가 없이 말다툼을 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행을 하여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고 폭행치사죄를 적용해서 경미한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3:15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누구를 미워한다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의 미움이 자라서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은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율법을 주신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이 추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둘째 목적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목적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이것이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5:6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 것 역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동일한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에게 주어진 복스러운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첫 번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 마음에 화평이 깃들 수 없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축복을 받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세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첫째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므로 그 어떠한 축복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없으므로 먼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으므로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죄가 다 사해졌으며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 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룩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로마서 5:2에 이르기를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전에 우리는 은혜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은 지금은 은혜 안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죄로 부패하고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했으므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나가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데리고 나가서 알현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의로 우리에게 옷 입혀 주셨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의 신분이 되어서 하나님의 궁정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여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의 일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걸인의 입장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 모든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로 말미암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로 이 모든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하나님의 영광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롭고 즐거운 곳이라도 천국에 비하면 외양간보다 못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과 22장을 읽어 보십시오.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뵙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18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이 피곤하고 지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마음에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위엣 것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3절에 보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노라면 때로 환난을 당합니다. 혹 보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환난을 당치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안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성도들에게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데, 그것은 환난이 영광의 도를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채찍에 맞고 풀려났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받는 환난이라면 거절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천국에서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을 기뻐하는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내가 빛을 발하고, 또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만약에 환난이 없다면 우리는 인내를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환난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그 다음,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환난을 인내로써 극복해 냄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연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정금을 얻기 위해 금광석을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제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고 하였습니다. 시험을 인내로 이겨 내는 성도는 연단을 받은 자이며 시험에 합격한 자인 것입니다.

그 다음,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망은 로마서 5장 2절에서 언급한 바로 그 소망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보증해 주십니다. 로마서 8:16에 보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계신 것은 곧 우리 마음에 ‘너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도장을 쳐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견고하고 최종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를 마음 깊이 되새기고 언제나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성도님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많아서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어딜 가나 환대를 받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새가 날아가듯이 명예는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원하는 것을 다 해 본 유일한 사람인 솔로몬은 말하기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쾌락을 통해서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룩할 때만 누릴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죄가 있는 곳에는 참 행복이 깃들 수 없습니다. 죄책이 우리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죄 사함 받고 죄책이 사라져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누리게 될 천국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빛과 촛불과도 같습니다. 혹은 다이아몬드와 유리 조각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방금 소개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글쎄요, 죽어봐야 알 것 같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더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5:5에 보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정성을 확신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들의 구원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에서 이르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둔해지지 말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은 특이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당시에 우리의 형편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첫째로, 아직 연약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었으나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잃어버려진 상태요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둘째로, 경건치 않은 자였을 때였습니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했고, 불의한 자요, 정욕을 따라서 살던 자였습니다. 

셋째로,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타고난 원죄를 가지고 있었고, 또 물마시듯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넷째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을 때였습니다. 
사람들과 원수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하물며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서야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원 상태는 비참하고 비극적인 것입니다. 터럭만치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랑에 대하여 로마서 5:6-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아직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아직 경건치 않은 자였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일방적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로운 일을 위해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차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의로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불난 집에 뛰어들어 자기 자식을 구해내고 죽은 어머니의 죽음은 모성애의 위대함을 보여 줍니다. 우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연인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원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가치하고 추악한 자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람을 위하여 제 목숨을 희생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있다면 죄와 허물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사랑이야말로 특이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한없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로마서 5:9-11에 보니,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불의한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칭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칭의를 얻은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이루었으며, 이 모든 것의 결과로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구원이 확실하고 최종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노라고 하면서도 자주 죄를 짓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범죄 할 때마다 마귀는 우리의 양심에 대하여 “그것 봐라. 네까짓 것이 무슨 의인이란 말이냐? 너 같은 것이 성도라고, 가소로운 말일랑 하지도 말아” 라고 참소합니다. 그리하여 과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일까? 칭의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오늘 상고한 로마서 5장 1-11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선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구원의 확고함과 불변함을 믿게 되고, 그 결과로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24에 보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성도들은 장차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땅을 밟고 살고 있지만 성도들은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확고한 것이며 최종적인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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