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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에 있나니 (전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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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손에 있나니 (전 9:1-10)
  

들어가는 말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한 유학생의 글입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입니다. 감리교의 시골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를 저주하고, 싫어하고, 교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며, 2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목사의 아들인 것이 싫었고, 목사가 된 형님도,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누나나 동생이 있는 것도 싫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바리새인들이 되어가는 사람들, 회칠한 무덤인 사람들을 보는 것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그런 저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지요. 죽어도 예수는 싫고, 교회가 싫다고 했던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만난다는 것이 무엇이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이냐?......... 저는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삶은 예수 사랑으로 가득차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면서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토론도 한 그런 식당을 뒤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한동안 공부를 하던 중 작은 창을 통해 오후 햇살이 제 책상 머리맡을 비추었습니다. 그 창을 통해 좀 전의 식당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도 없는 텅 빈 식당에,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소란스럽고 시끌시끌했던 그곳에 따뜻한 오후 햇살이 가만히 내리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가만히 제게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환상을 봤다는 얘기지요?)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모든 이들을 가만히 끌어안으시고…….
교만한 자와/ 상처받은 자와/ 거룩하지 못한 자와/ 정직하지 못한 자와/ 배신한 자와/ 무력투쟁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자와/ 소심한 자와/ 비겁한 자들이 그 품안에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가득한데…….

예수님....... 
침으로 얼룩지고, 피로 얼룩진 예수님의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그리고 가만히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탓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저는 가만히 이런 이미지를 보면서 도서관에서 혼자 말없이 공부도 못한 채...... 울었습니다.”

이 글은 한 학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되어 여러분께 소개했습니다. 
본문 전도서 9장을 읽어보면, 지혜자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현실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의미겠지요?
그러나 지혜자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지혜자 솔로몬은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

1.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9: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또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너무 좋은 말씀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우리 인생살이를 한 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발이 빠르다고 일등 하는 것이 아니고, 힘 있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꾀가 많다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재주가 많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다 때와 장소가 맞춰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와 장소를 누가 주관하십니까?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의 손을 의지합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성도의 삶이 자신만만한 것은, 성도의 삶이 담대한 것은, 성도의 삶이 평안한 것은, 자기에게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돈이 있어서도 아니고 건강이 있어서도 아니고 자식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지나놓고 보면, 그런 것들은 해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요, 하루 사이에 시드는 들풀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 담대하고, 평안하고, 여유 있고, 소망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삶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약 40군데 나오는데 그 중에서 한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넘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환난을 겪는 분도 있을 것이고, 어젯밤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지새운 분도 있을 것이고, 답답한 가슴 쓸어내리지 못해 긴 한숨을 내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때가 우리가 넘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아주 엎드려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군대에 가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나 산악훈련을 받을 때에 손잡는 법을 배웁니다. 
손을 어떻게 잡느냐하면 서로 엉켜서 상대방의 손목을 잡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힘이 빠져 손목을 놓더라도 상대방이 자기의 손목을 잡기 때문에 떨어져 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가 맞잡은 손 모양도 이렇습니다. 
우리가 힘이 빠져 손이 풀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손목을 잡고 계시기에 우리는 아주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실망과 좌절과 회의와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손목을 놓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계셨음을 너무도 많이 체험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foot prints(발자국)이란 어느 무명시인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주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 걷는 꿈이었습니다. 지나온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모래위에는 두 발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모래위에는 발자국 하나만 새겨져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주님께 여쭤봤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러나 내 생애의 가장 어려울 때에 한발자국만 새겨져있어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가장 주님이 필요할 때에 왜 주님은 나를 떠났는지......’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했고, 결코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가장 힘들어 할 때 새겨진 한 발자국은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이란다......” 

지난주일 오후 예배 시간 우리는 이용례 권사라는 분의 찬양과 간증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특별히 감동스러웠던 것은 10살 때 아버지를 폐결핵으로 떠나보낼 때였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어린 딸은 고아가 되는 것이 너무 두려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린 딸의 마음속에는 이 일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미워요!”

세월이 흘렸습니다.
장성하여 신실하고 능력있는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입장하는 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 대신 이 신랑에게 너를 맡긴다.”
하나님은 어린 딸의 기도를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적당할 때 가장 적절하게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여, 내 손을

①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②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2.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인데 그것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죽음은 누구나 직면해야 할 문제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게 확실한 사실이라면, 사람이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구원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밥 먹다가도 깜짝 놀라 수저를 놓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구원문제입니다.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구원문제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은 교회에 잘 다니는지, 봉사 잘 하는지, 체크해 보라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세월의 부대낌에 관계없이, 기분이 좋을 때는 구원 받은 것 같고 기분이 언짢을 때는 구원 못 받은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구원에 흔들림이 없는지 확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나 선행이나 착한 삶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에 우리의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악행으로 잃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받는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1%만 들어가도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수없이 반복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죽음의 신이 애굽 전토를 휩쓸 때, 집 문인방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으면 죽음의 신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을 영어로 pass over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문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칠해진 그 집안에 도둑질한 도둑놈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그 집안에 사기꾼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그 집안에 애굽 이방인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그 집안에 불효자식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그 집안에 안식일을 안 지킨 사람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그 집안에 살인한 사람이 있었다면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다 살았지요! 
죽음의 신은 어린양의 피만 봤으니까요! 
‘피를 볼 때에!’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어린양의 피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구원받습니다. 
도둑도! 배신자도! 살인자도! 간음자도! 불효자도! 다 구원받습니다. 

눅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눅18:11절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서는데 떳떳했습니다.
할 만큼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눅18: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쳐다볼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다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누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냐 하면 떳떳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떳떳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긍휼만 바랐던 세리였습니다.
눅18: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세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심판이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심판받는다하면 겁부터 나고 두렵지요? 
릭 하워드가 쓴 ‘부요한 구원 가난한 구원’이란 책이 있습니다. 
‘생명의 삶’이란 책자에 그 책에 대한 소개의 글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받는 심판을 ‘행복한 심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상상해보라.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심판 때에는 감춰진 비밀뿐만 아니라 당신 마음 깊은 곳의 생각과 동기들까지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신에게 두려움과 찔림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만나게 될 심판대는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감당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시상대가 될 것이다. 

형벌을 주는 심판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두려워 말라! 
당신에게는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이 있으니까! 
기뻐하라! 
당신에게는 마땅히 받아야 할 상급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심판은 행복한 심판이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때때로 여러분의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그 손을 놓친다하더라도 주님은 여전히 여러분의 손을 꼭 잡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②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우리에겐 행복한 심판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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