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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품꾼을 부르는 선한 주인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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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꾼을 부르는 선한 주인 (마태복음 20:1-16)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합니다.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자 청년은 부모를 잘 만난 덕인지 능력이 좋은지 일찌감치 부자가 되었고 사회적인 지위나 율법을 잘 지키는 종교적인 열심 등 모든 면에서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작은 부자는 스스로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옛날 유대 사회에서도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제자들이 감짝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지난 여름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랑했던 부자 관원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후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영생도 좋지만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민하며 저울질하다 그만 물질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혹시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 약속했습니다.그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칭찬을 하셨습니다.유대 사회에서 매국노와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세리장 삭개오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온 것은 솔직히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복받은 사람,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 자신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픈 마음 때문이었습니다.그것도 유명하신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천국시민으로서 먼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세의 복과 영생의 상징으로 굳게 믿었던 그의  재물이 그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을 모델로 삼아 구원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맥없이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저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저 사람은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 버렸으니 그 보상이 무엇인가 질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에서 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부자 청년이 가진 것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래도 가진 것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혹시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때 나를 따르는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며 결론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셨습니다.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재물이 많고 적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지만 재물 때문에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돈이 너무 많아 세상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어 즐기며 살다가 영생에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육신의 것만 따르다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고 결국 세상에게 굴복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고, 언제나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그러나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가난하면 누구나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영생은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부자에다 율법도 잘 지키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옛날 유대인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기준으로 정하고 믿었던 고정관념에 불과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낡은 통념을 깨뜨리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자신만만하다고 얻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처럼 확신이 없어 염려한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 영생입니다.영생 혹은 구원은 사람이 노력하거나 본성이 착하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 뜻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앞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맨나중이 되고 나같은 사람은 안될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앞서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그것이 천국의 비밀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들을 모집하러 날이 밝기 전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그런데 주인은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른 제삼시에 또 장터로 나갔습니다.유대인의 제삼시는 현대 시간으로  아침 9시인데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놀고 서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비록 첫 시간을 놓쳐 풀타임 일당을 받을 수는 없지만 적당히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포도밭으로 들어갔습니다.그런데 주인은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또 나가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섰는 사람들을 보고 동일한 방식으로 포도원으로 불렀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도 하루 일당의 반토막이나 아니면 밥값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기대하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주인의 일군 모집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까?주인은 제11시 즉 오후 다섯시에 또 장터로 나갔는데 거기 놀고 있는 사람들을 또 있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풀죽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에게 줄 양식을 사들고 갈 수 있는데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후 다섯시는 농장 일이 마감하기 한 시간 전이니 이제 누가 우리를 쓰겠다고 부르겠는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들은 맘 속으로 울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실직자들과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살벌한 취업경쟁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력시장 언저리를 서성대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새직장을 얻으려고 대기중인 명예퇴직자들의 심정이 오늘 장터에 나온 품꾼들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다섯시에도 놀고있는 사람들까지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어떤 주석가의 말처럼 포도 추수기에 일손이 부족하여 눈에 뜨이는 대로 모두 불러들였을까요?수확기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고 애쓰는 주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는 일이 품삯을 나눠주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의 순으로 품삯을 나눠주라 하였습니다.그런데 오후 다섯시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받은 품삯이 놀랍게도 온전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돈을 받은 일군이 당황하여 ‘이거 혹시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줄 것을 저에게 실수로 주신 것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청지기가 그 사람에게‘우리 주인님이 그렇게 하라 했으니 아무 말 말고 받아가시오’하자 돈을 받아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주인 앞에 큰절이라도 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아 종일토록 장터에서 서성이며 맘고생했던 우리를 포도원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하루 일당을 통째로 받았으니 놀랍지 않은가 하며 주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을 것입니다.  

앞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다음 사람들 역시 주인의 너그러움에 놀랐고 중간에 들어와 하루 일당의 절반이나 혹 그 이상만 받아도 족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은 머리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이 포도원의 기본급은 한 데나리온인가 보다. 

그럼 거기에 시간 수당이  붙으면 얼마나 될까? 오늘 운수대통이로다 하고 잔뜩 기대하며 받은 돈을 세어보니 역시 앞 사람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뒤로 갈수록 품삯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빛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너그러운 주인에 대한 칭송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침내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이런 사람들과 하루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참고 일한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시면 안되지요’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은 일군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기술이 좋고 일도 잘해 먼저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장터에서 빈둥거리다 뒤늦게 한 시간만 일한 친구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주인의 태도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포도원의 품삯 지급 기준은 도대체 뭐야?  라고 수근거릴 때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합니다.

이보게 친구,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내가 그대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그대가 받은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게.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그대와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인가?내가 너그럽게 베푸는 것이 그대 눈에는 거슬리는가?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주인과 일군들의 대화 내용이고 마지막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내린 비유의 결론입니다.

추수기에 일손이 모자란 주인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불렀다면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품삯을 시간당 꼼꼼이 계산하여 나눠주었을 것입니다.그래야 주인도 손해가 없고 일군들도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품삯을 준 것을 보면 이 주인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득을 남기려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약속한 대로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은 악덕 주인도 아닙니다.자기 이득보다는 일자리를 주고 품삯을 주려는 선한 마음으로 일군을 불렀으니 존경을 받으면 받았지 원망을 살만한 사람은 아닙니다.이런 주인이 어디 있다면 그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전국의 일군들이 몰려들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주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일군들 역시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런 주인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주인이 정말 있다면 일부러 오후 다섯시에 장터를 어슬렁거리다 그 주인의 눈에 뜨여 대충 일하고 하루 품삯을 챙기려는 게으르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비유는 그런 것까지 예상하여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들려준 비유의 목적은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비유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아니다를 따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됩니까?’(마19:27) 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천국은 이와 같다고 설명하신 대답으로 이해하면 족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한 일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천국 스타일이라는 것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렇게 너그럽고 선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으로 들어온 일군들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뜻대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그러므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불평하거나 오해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익숙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렇게 독톡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너무 생소하여 적응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하고 시기가 나며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지요’하고 하나님을 한 수 가르치려 든다.  이것이 먼저 온 품꾼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던 태도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영생을 주실까?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훨씬 양심적이고 주의 사업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희생하며 오래 전부터 수고했는데 나는 알아주지 않고 이제 막 예수 믿은 어린애 같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을 받다니 이것은 불공평하다.나는 몇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이제껏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데 저 친구들은 뭔가?세상에서 맘껏 즐기고 못된 짓만 골라 하다 이제 교회 다녀보겠다고 어쩌다 얼굴 한 번 보이는데 저런 사람도 영생을 얻는다면 나는 정말 억울하다.  하나님이 나를 저런 친구들과 똑같이 취급하신다면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입니다.나중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을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온 힘을 다해 기쁨게 일하고 있습니다.하나님 나라 시민은 이런 감격과 기쁨으로 층만하여 사는 사람이며 그 나라의 특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은 천국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던져진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두려웠던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천국문 앞에 선착순으로 줄을 선다면 맨 꼴찌에 서있다 문 닫는 시간이 되어 잘려나갈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디쯤 와있다고 생각했을까요?이른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고 아침 9시나 낮 12시쯤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모태신앙인가 아닌가, 종교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런 것보다 그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진심으로 갈망하며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는 사람인가를 보십니다.스스로 앞섰다고 생각하여 나중 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등한 취급 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 받고 일하기로 약속한 일군은 뜨거운 햇빛과 더위와 씨름하며 수고해야 하는 것을 알고 동의한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땡볕에서의 수고와 인내를 감수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내가 일찍부터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동안 포도원 밖 세상이라는 장터에는 아직도 부름 받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서성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합시다.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부터 세상이라는 장터로 나가셨을 뿐 아니라 지금 구원의 역사가 종결되어 가는 석양의 시간에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어떤 사람은 모태신앙인으로 불러내시고 어떤 이는 청년의 시절에,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장년과 노년의 시절에 부르시기도 합니다.그리고 어떤 이는 병상에서 마지막 가쁜 호흡을 내쉬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로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열두 대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려있는 열두 문은 세계 모든 민족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열두 문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난 문은 아침 햇살을 받는 방향으로 난 문인데 이 문은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어린아이들이 들어오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서쪽으로 난 문은 석양의 햇살을 받으며 노인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남쪽 문은 한참 일할 나이에 주님께 부름 받고 들어가는 순교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빈손 들고 주께 와 십자가를 붙드네’하고 고백하며 들어오는 문이라 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 천국문이 닫히려는 순간까지 세상의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쉬지 않고 불러모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선하고 너그러우심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공헌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 빈손 들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렸던 강도 역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공평하고 부당합니까?그러니까 나도 젊을 때 잘 놀다 인생의 석양에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까?누가 자기 맘대로 원하는 때에 구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 주인과 같다’하셨지요?  먼저 온 사람부터 나중 온 사람 순으로 일당을 주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이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의 순으로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나눠주는 것은 천국 스타일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받게 하는 이것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이었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일군의 기쁨과  감사하는 모습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보고 깨달아야 했습니다.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지난 날의 추억으로 여기고 지금은 기쁨도 눈물도 감사와 가슴 벅참도 사라지고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뜨거운 가슴으로 신앙생활하는 다른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며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기쁨으로 가득한 순수한 영혼들을 보며 나는 어디서 그것을 떨어뜨렸는가 생각하고 잃어버린 여러분의 첫사랑을 회복하여 주 안에서 날마다 감사하는 충성스런 주의 일군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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