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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을 위한 4대 조건 (출 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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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위한 4대 조건 (출 31:1-11)  

< 은혜의식을 가지십시오 >   

인천에서 목회할 때 전도하던 한 전파사 주인이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 것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제 주먹을 믿고 삽니다! 저는 통뼈라서 누구도 겁나지 않고 강심장이라서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도 저를 막지 못합니다. 죽음도 겁나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을 고귀하게 보고 끝까지 고귀하게 사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고귀하게 사는 것일까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찾고 그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물건들도 다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는데 사람에게 목적이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을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고 지금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 자체를 은혜로 여기고 지금까지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십시오. 살면서 가장 피해야 할 의식이 ‘피해의식’이고 가장 가져야 할 의식이 ‘은혜의식’입니다. 피해는 빨리 잊을수록 좋습니다. 피해를 잊지 못하면 정신이 병듭니다. 왜 의처증과 의부증에 걸립니까? 피해를 잊지 못하는 지나친 기억력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처증에 걸렸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심하는 것인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의처증에 걸렸다면 대부분이 자기는 아니라고 펄쩍 뜁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는 의처증 증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피해를 당했던 날짜에 대한 뚜렷한 기억력을 가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2008년 7월 28일 3시에 이렇게 했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거의 병든 상태입니다.

과거의 마음상한 일에 너무 몰두하지 마십시오. 피해는 쉽게 잊을수록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의식이 생겨 사소한 일에서도 상대방의 언행을 사사건건 트집 잡다가 결국 마음과 정신이 병듭니다. 받은 피해는 쉽게 잊을수록 좋고 받은 은혜는 쉽게 잊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피해 기록은 모래에 쓰고 은혜 기록은 대리석에 쓰십시오. 은혜의식을 가지면 기쁨과 만족이 커지고, 사랑과 보람도 커지고, 인격과 삶의 질도 향상됩니다.
  

< 성공을 위한 4대 조건 >   

하나님은 성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지 않고 찬란한 계획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그 계획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본문에는 성막 제작의 총괄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임명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통해 성공을 위한 4대 조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르심의 확신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은 유다의 6대손이고 훌의 손자이자 우리의 아들이었던 브살렐을 성막 제작의 책임자로 지명해 불렀습니다. 성공적한 삶을 향한 제일 기초 관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찬란한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꿈과 비전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어떤 일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역경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다 보면 주변의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위축되기도 하지만 현재 큰 것보다 꿈이 큰 것이 오히려 더 자랑거리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일로 부르실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브살렐에게 어떤 능력을 주셨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사람들은 가끔 성령 충만이 오순절 사건 이후에 주어진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구약 때도 하나님이 특별한 어떤 일로 일꾼을 부를 때 성령 충만과 동시에 합당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처럼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의 은사를 주시고 여러 가지 재주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재능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재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때 은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노래 잘 부르는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면 그 재능은 은사가 됩니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찬양을 잘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휘자도 은혜가 넘치면 찬양으로 은혜를 끼치려고 하지만 은혜가 없으면 노래만 잘하려고 하니까 조금 틀렸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오히려 은혜가 안 됩니다.  

오래 전에 뉴욕의 얼라이언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한 큰 교회의 찬양발표회에 갔었습니다. 그 찬양 팀에는 줄리아드 음대 출신의 쟁쟁한 성악가들도 많았지만 별로 은혜는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평범한 성가대의 찬양에는 왜 은혜가 넘칩니까? 은혜 받은 감동으로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재능을 은혜의 통로나 도구가 되도록 은사화시키십시오.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재능이 탁월합니다. 손만 벌리면 돈이 착착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누고 바치는 은사는 따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은 많지 않는데 잘 나누고 잘 바칩니다. 그것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잘 나눕니다. 계산적인 현대인들 사이에는 별종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눔과 바침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재능과 성품을 좋게 은사화시킬 때 가장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이 주어집니다.
  

2. 연구하는 태도  

성막 총 책임자인 브살렐의 임무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브살렐은 성령 충만으로 성막 건축과 관련된 각종 은사를 가졌지만 동시에 정교한 일을 연구하면서 성막을 건축했습니다. 그처럼 은사가 있다고 나태하지 말고 땀을 흘리며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 건축과 기구의 제작에 대한 세부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침대로 잘 건축하려면 여러 고안과 계획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기계적으로 부리기보다 유기적으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고 기도하는 사람임을 앞세워 기도만 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뤄내십시오.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을 보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와 간구만 하면 다 됩니까? 아닙니다. 생각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빌립보서 4장 8-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성도는 어떻게 해야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해서 무식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는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성도는 기도도 잘하고 생각도 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땀 흘려 실행하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땀이 있는 곳에 길도 있습니다.  

비전과 공상은 다릅니다. 공상은 마음만 높아지게 해서 정직한 땀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비전은 땀 흘려 준비하는 겸손한 사람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좋은 기회를 주시지 않고 누구에게나 최상의 기회와 가능성을 주십니다. 그 기회와 가능성을 누가 살립니까? 땀 흘려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꿈의 사람 요셉은 어려운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현재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실상 요셉은 꿈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꿈을 뒷받침한 땀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지만 그래도 땀을 흘리면 어디선가 축복의 길은 반드시 열립니다. 그처럼 내일을 위해 지불하는 오늘의 땀은 행복의 씨앗이고 복된 삶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제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 타령이나 “내가 왕년에 뭐했다!”는 왕년 타령을 버리고 정말 자랑할 만한 오늘의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땀을 흘리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랑거리를 만들려는 구체적인 꿈과 계획이 없습니다. 그리고 꿈과 계획이 있어도 그 꿈을 위해 대가를 치르려는 준비도 없이 그저 마음만 높아져 있고 서두르기만 합니다. 그러나 땀의 준비가 없는 꿈과 비전은 실체가 되지 못합니다. 이제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내일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성공과 축복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3. 동역자의 후원   

본문 6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하나님은 브살렐을 성막 건축의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사역을 도울 조력자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성령님이 지혜를 주셨지만 인간 오홀리압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동역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갈 때 홍해를 극적으로 건넜지만 곧 바로 광야가 펼쳐졌습니다. 그처럼 축복의 여정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굶주림의 공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강자의 폭력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출애굽의 꿈이 광야의 모래 먼지 속에 점차 매몰되면서 백성들은 생존본능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툭 하면 리더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외적의 공격도 있었습니다. 광야의 유목민인 아말렉이 공격해온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최대의 위기 극복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고 산꼭대기에 서서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상황을 묘사하면서 백성들의 전투 상황보다 산에서 손을 높이 든 모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해 손이 쳐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 상황에서 모세의 팔이 내려갈 때 아론과 훌이 양편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주어 마침내 그 전쟁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리더도 때로는 영적으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론과 훌처럼 말없이 다가와 지친 팔을 들어주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인 아말렉과의 전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전투는 죽이려는 전투가 아닌 살리려는 전투이고 무기 대신 사랑을 든 전투입니다. 그 전투에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며 함께 싸우면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서 영적인 아말렉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대개 동역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사람도 동역자들의 협력과 기도와 후원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 또한 아무리 구체적인 비전과 놀랄만한 콘텐츠가 준비되어 있어도 동역자들의 헌신이 없으면 비전성취의 발걸음은 늦어집니다. 반면에 성도들이 모세의 동역자인 아론과 훌 같은 존재가 되고 바울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루디아와 같은 존재가 될 때 그 공동체는 반드시 은혜를 입고 비전을 이룰 것입니다.  

저도 지난 20년간의 목회사역을 되돌아보면 그런 동역자들의 은밀한 헌신이 있었기에 비전을 지탱시킬 수 있었고 내일의 찬란한 꿈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경제적인 위기의 순간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하나님이 은밀한 헌신자와 동역자를 예비해주셔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동역자는 도울 명목을 억지로 발굴해서 후원해줍니다. 그런 예상치 못한 사랑의 후원을 갑자기 받고 감동에 젖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감동적인 사랑의 동역이 있을 때 꿈과 비전의 나무는 높이 잘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4. 순종하는 자세 

본문 6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지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어떤 마음이 필요합니까?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결국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최고의 순종자가 최고의 지혜자입니다. 성막을 건축할 때 함께 한 일꾼들이 이렇게 따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팀장님! 그 설계를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왜 성막에는 창문이 없습니까? 건축학상으로는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본문 6절에 나오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는 실제로 성막 건축 기술을 가진 자란 뜻인데, 그들은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도와 성막, 성막 기구, 제사장 의복, 관유, 향 등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작했습니다(7-11절). 결국 성막은 하나님이 뜻을 세우고, 모세가 그 뜻을 전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그 뜻대로 이끌고, 실무자들이 그 뜻대로 순종해서 건축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좋은 동역자가 순종하며 리더의 뜻을 잘 받쳐주면 대 역사가 이뤄집니다.   

인간은 진흙과 같은 존재지만 하나님에 의해 잘 빚어지면 위대해집니다. 그처럼 각 성도에게 잠재한 위대한 인물의 가능성은 누구도 측량하지 못합니다. 이곳에도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최대 요소가 무엇입니까? 바로 진흙의 고분고분함입니다. 고분고분함이 없으면 대개 작품인생은 나오지 않습니다. 드문 일이지만 혹시 작품인생이 되어도 행복한 인생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종만큼 복된 덕목은 없습니다.

왜 삶에 고난이 주어집니까? 결국은 순종 훈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먼저 시련의 방망이로 교만과 자존심과 성질과 아집을 깨뜨리십니다. 그 손길을 불평하며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저를 왜 이리 초라하게 만드십니까? 해도 너무 하십니다.”라고 하면 더 큰 시련을 당합니다. 반면에 시련 중에 온전히 깨진 심령이 되면 하루라도 더 빨리 복된 길이 펼쳐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인들은 다 자신이 깨진 후에 복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비체험이 많아서 은근히 교만했던 요셉은 13년의 노예생활과 감옥생활로 깨진 후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모세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깨지고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결국 인생 승리의 최대 비결은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조치에 온유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정에는 시련이 있어도 결국은 승리합니다.  

인생의 성패는 맹목적인 운명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수많은 사건과 사람, 그리고 심지어는 원수의 손을 통해서도 인생을 빚어 가십니다. 때로는 부모님을 통해 인생을 빚어 가시고 때로는 돈을 떼먹은 사람이나 큰 상처를 준 사람을 통해서도 인생을 빚어 가십니다. 

가끔 너무 서러운 일을 당하면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러나 하나님은 무심한 분이 아니고 세심하게 인생을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련만 보지 말고 그 시련 너머에서 미소 짓고 있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치 있는 작품 인생으로 만들려고 그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아도 시련이 계속되면 정말 힘듭니다. 그래도 인내하십시오. 작품이 되려면 때가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일정 기간 동안만 그런 환경을 배정하신 것입니다. 어린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처럼 시련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수로 어려움이 닥쳤어도 그 어려움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믿고 극복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내십니다. 시련이 없으면 좋겠지만 시련이 있어야 작품이 되기에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진흙이 뜨거운 가마를 통과하며 단단해지고 유용성과 가치가 높아지듯이 수많은 위인들과 헌신된 일꾼들이 다 고난의 가마를 통과해서 순종이 체질화되면서 결국 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조치에 순종하는 인격이 체질화되면 그 다음에 다가올 것은 복밖에 없습니다.
  

< 자기 한계를 극복하십시오 >   

사람들은 대개 신앙을 통해 물질문제, 가정문제, 진로문제 등을 해결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와의 씨름은 신앙의 초보단계입니다. 기독교에는 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선 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은 거룩한 꿈과 환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을 크게 보게 되고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꿈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꿈을 따라 살면 은혜와 축복과 영향력을 얻는 역사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력도 없었고 학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좇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많은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은 찬란한 꿈과 비전입니다. 그 선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성공입니다.  

모든 역사와 기적은 자기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면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자신을 포기하고 노력도 포기하고 생각 없이 살면 누가 자신을 돕겠습니까?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자기의 가능성을 보고 자기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거북이가 한양으로 가는데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자기도 한양 가겠다고 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야 타!” 하고 등에 태우고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다가 보니까 굼벵이도 꿈틀거리며 한양 가겠다고 가고 있었습니다. 또 너무 불쌍해서 “야 타!” 하고 태우고 갔습니다. 그 둘을 태우고 거북이가 으스대며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를 꽉 잡아! 나 되게 빨라!” 그러면서 성큼성큼 기어갔습니다. 그러자 지렁이와 굼벵이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거북아! 너 정말 빠르다!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니!”

그 장면을 보면 냉소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잘들 논다.” 얼마나 어리석은 거북이와 지렁이와 굼벵이입니까? 그들은 자기 한계 속에 갇혀서 거북이보다 훨씬 더 빠른 말과 새가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한계 속에 갇혀 우물 안에서만 잘들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에게는 생각을 초월한 엄청난 축복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를 꿈꾸고 준비하고 나가십시오.   

우리 교회는 한국에서 나눔의 대표적인 모델 교회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을 계속 품고 나가면 나눌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많이 나누라고 성경 전권 설교파일을 위한 <미션퍼블릭 사역>과 <온라인 새벽기도 사역>을 주셨고 물질적으로도 많이 나누라고 <네트영어 사역>을 주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고 신비한 동역자를 만나면 그 사역들이 높이 비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달림으로 마침내 나눔의 꿈을 멋지게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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