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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과 신(神) (출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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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신(神) (출 20:3-6)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본능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본능, 물을 마시고 싶은 본능, 이성을 찾는 본능, 오래 살고 싶은 본능 등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신(神)을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증거로 어느 나라나 어느 종족이나 그들이 섬기는 신(神)이 있습니다. 간혹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포탄이 떨어지는 반공호 속에서 신(神)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면 누구나 다 신(神)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1970년도에 해병대 청룡부대로 월남전쟁에 참전을 했습니다. 해병대를 군인중의 군인이라고 말합니다. 해병중의 해병은 수색대입니다. 제가 그 해병대 수색대에서 14개월간 전쟁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에도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동료 해병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하면“야, 하나님이 어디있어?”또 어떤 사람은“야,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어.”라고 하며 비웃었습니다. 

해병대 수색대는 전쟁을 하되 헬기를 타고 적진 한가운데로 투입됩니다. 한번 씩 작전을 나가면 20일~30일정도 작전을 전개하고 후방으로 돌아옵니다. 작전을 나가면 반드시 전사자와 부상병들이 생기게 됩니다. 같이 헬리콥터를 타지만 돌아올 땐 그 헬리콥터를 타지 못할 사람이 반드시 나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안에 찬 군인들은 출동 전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술로 마음을 달래며 밤을 새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날이 밝고 헬기장으로 가서 헬기를 타기 전에는 항상 군인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십니다. 평소에“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어.”라고 말하던 군인들이므로 목사님의 기도를 거부해야만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 한명도 목사님의 기도를 거부하지 않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제일 먼저 기도를 받고자 야단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진실할 때는 죽음 직전이라고 합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적진으로 향하는 귀신 잡는 해병들은 모두가 죽음 직전에 처해있습니다. 이들의 죽음 직전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모두가 신(神)을 찾고 신(神)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다 신을 찾고 의지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신(神)들린 무당이 날선 작두위에서 맨발로 널뛰듯 뛰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래도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신(神)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을 섬기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神)의 선택은 우리 인간의 삶과 아주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 행복의 요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 둘째,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 것인가? 셋째,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행복의 요건 중 가장 중요한 첫째가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신(神)으로 섬기는 종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 스스로 만든 신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강한 존재를 의지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의지하고 싶어 하면서 도리어 자기보다 도리어 무능한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산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고목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많이 섬겼던 서낭당 나무가 그것입니다. 산속에 살고 있는 짐승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무생물인 돌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남 공주에 있는 계룡산 한 계곡에는 바위에게 공을 드리며 촛불을 켰는데 녹아내린 촛물이 추운 겨울날 바위에 흐르던 물이 얼어붙어 하얗게 된 것처럼 보이는 바위를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남자들이 보신용으로 잡아먹는 뱀을 수호신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인도에는 소를 신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소를 섬기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죽은 돼지 머리를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건물 기공식이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 일이 잘되도록 하고자 삶은 돼지 머리에 돈을 물리고 절을 하며 고사를 지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직도 있습니다. 

안전운전을 위해 우리나라 운전기사들의 80%가량은 몸에 부적을 품고 다닌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또한 새차를 구입하면 사고를 막기 위해 핸들 밑에 마른 명태에 실타래를 감아두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교통사고율 세계 1위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존재를 의지한다는 것이 아무 힘도 없는 돌이나 바위, 산짐승, 뱀, 목을 잘라 뜨거운 물에 삶은 돼지 머리를 지의하여 거기에 복을 빌고 있습니다. 

둘째,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점쟁이가 3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등록되지 아니한 점쟁이를 다 합하면 8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점쟁이는 기업처럼 증권사에 상정까지 한다고 합니다. 특히 입학이나 취직 때, 선거철이 되면 점집에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 어두움의 영들인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입니까?

셋째, 참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신(神)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을 펴면 첫 장 첫 절에 기록된 말씀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자연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로마서 1:20). 대자연의 섭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해와 달과 수많은 별들, 잎이 피고 지는 계절의 변화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과일 나무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오물위에 심겨진 과일나무가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맛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대자연의 법칙을 어떤 사람은 우연히 있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건물이 우연히 어느 날 땅 속에서 철근이 튀어 나오고, 하늘에서 시멘트가 떨어지더니 저절로 이것저것들이 서로 얽혀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건축공학에 의한 철저한 설계와 시공의 결과가 이 건물입니다. 

사람의 인체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창조자의 솜씨에 감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두 가지만 말씀을 드린다면, 인체의 심장은 사람의 주먹 정도 크기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에 있는 전체 혈관의 길이는 약 8만km로 지구 두 바퀴의 길이에 해당합니다. 심장의 1일 박동량은 약 10만 번 정도가 됩니다. 주먹 만한 심장에서 품어내는 피의 1일 공급량은 약 1만 리터(2리터 물병 5000병)로 나 된다고 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피를 품어냅니다. 이것이 저절로 우연히 진화해서 된 것이겠습니까? 

한 대학교의 교수가“18분의 1초”라는 글을 썼습니다. 모기 한 마리가 왼손 등에 앉으면 신경이 두뇌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러면 두뇌는 눈에게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눈이 확인하여 보고를 하면 두뇌는 이번에는 오른손에게 모기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을 받은 오른손이 왼손 등에 앉은 모기를 잡습니다. 두뇌가 다시 눈에게 모기가 잡혔는지 확인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눈은 확인하여 보고를 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신경과 두뇌가 오고가서 모기를 잡는데 걸리는 시간이 18분의 1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체의 신경 조직이 우연히 저절로, 또는 진화로 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정교하게 지음 받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불행이 있습니다. 슬픔이 있고, 좌절이 있고, 실패가 있고, 영원한 멸망인 지옥의 형벌의 자리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춰진 인간은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죄를 감추고 삽니다. 그래서 죄가 드러날까 봐 늘 걱정이 되고 겁이 납니다. 이 세상에는 드러난 죄가 있고 감추어진 죄가 있습니다. 드러난 죄를 지은 사람은 교도소로 갑니다. 그렇다면 드러나지 않는 죄를 지은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교회에 처음 왔는데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준은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죄와 기준과 다릅니다. 사회에서의 죄는 드러난 것만 죄로 인정합니다. 드러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죄가 아닙니다. 철저한 증거 위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드러난 것만 아니라 사람이 볼 수 없는 마음속의 죄악 된 생각을 기준으로 죄를 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을 자세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면 살인한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미움이 쌓이면 살인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탐을 내면 도둑질한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탐심이 쌓이면 도둑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심을 품으면 간음한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음욕이 쌓이면 감음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삶은 캄캄한 흑암입니다. 흑암 속에서는 어디가 길인지 찾을 수 없습니다. 끝없는 방황만 있을 뿐입니다. 6.25동란 이후 찢어지는 가난 속에 한이 맺혀“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노래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결과 지금은 세계 속에 우뚝 선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비포장도로가 단 한곳도 없습니다. 심지어 농사짓는 농로까지 포장이 다 됐습니다. 고속전철이 만들어져서 전국이 1일 생활권입니다. 

그야말로 꿈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하고, 행복하십니까? 우리나라에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42명 정도나 된다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 이토록 많은 가정들이 무너져 내립니까? 왜 이토록 청소년의 비리가 만연합니까? 환경이 바뀌고 제도가 바뀐다 해서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행복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가 흑암 속에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방황하다가 마지막 죽으면 죄인들에게 내려지는 또 다른 형벌 지옥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법에 의해 죄가 드러난 사람은 감옥에 갑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시기를“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살아서도 절망, 죽어서도 절망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불교의 중심에는 석가가 있습니다. 유교의 중심에는 공자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중심에는 모하메드가 있습니다. 서구 철학의 중심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여기에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인류의 정신을 이끌어 왔던 종교와 사상과 철학의 배후에는 창시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 없이 모두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불완전하고 원죄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시대를 살다가 다 죽었습니다. 어떤 종교나 철학도 그것을 만든 사람은 유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가 어떤 성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종교를 창시하고 죽습니다. 종교와 사상과 철학은 계속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을 만든 인간은 죽습니다. 결국 우리는 본질인 생명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 사상, 철학과 기독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기독교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남을 도우며 착하게 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누구를 믿느냐가 종교의 본질입니다. 

석가나 마호메트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무덤을 웅장하게 꾸미고 그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약 2천 년 전 세상에 태어나서 한 인간으로 33년의 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종교는 죽은 교주를 믿지만 기독교는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기독교의 자랑이자 유일한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인간과는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죄를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인간은 자라면서 욕심과 질투와 미움이 생깁니다. 그 죄가 장성하면서 하나씩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은 누구나 다 영원한 형벌인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을 구해줄 사람은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물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물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인간밖에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을 해도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할 사람은 인간이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처럼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2천년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33년간 계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절망과 우리의 고통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인간으로 끝났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었지만 본질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으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화려한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예수가 선하고, 사랑과 봉사를 많이 한 성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습니다.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죽음과 가난과 저주가 사라집니다. 치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와 죽음 이후의 삶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인류역사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B.C와 A.D로 나눠집니다. 올해가 2012년입니다. 무엇으로부터 2012년이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로부터 2012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 연호입니다. 불교는 불기를 말하고, 단군을 숭상하는 사람은 단기를 말하고, 일본은 황기를 말하고, 북한은 주체 연호를 말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입니다. 고대의 역사적 유물가운데에는 현대과학이 풀지 못하는 불가사이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모르지만 옛날 그들은 해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이 그렇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장수한다해도 100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이 짧은 생명도 무엇보다 소중한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이겠습니까? 

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부르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 최대의 난제를 해결한 증거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식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사회가 바뀝니다. 기독교가 영국에 들어가자 해적의 나라가 1등 국가로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미개한 인디언의 땅 미국에 기독교가 들어가자 3백년도 못된 나라가 세계역사를 주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교육, 과학, 예술, 의료 모두가 기독교 산물입니다. 우리나라 자체적 연구 결과가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곳에는 이 세상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예를 들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몇 년 전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몸통만 가지고 태어난 닉 부이치치라는 호주의 젊은이가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그 몸으로 그는 너무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과 정신이 너무 밝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온통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건강한 사람들에게“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라.”충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나는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이니까요. 여러분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38개국을 다니며 강연을 했고, 네 명의 대통령을 만나 간증했고, 5개국 국회에서 연설을 했고, 지금까지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3백7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3만 곳에서 강연 초청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도 한때는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릴 부모님과 형제들을 생각해보니까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5살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느 장님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 제자들이“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대답하십니다. 

이 젊은이가 그 말씀을 읽는 순간“나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나는 하나님이 내 몸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만들어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만들어 주시면 나는 지금처럼 사역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두시는 것에 감사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말하기를“행복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희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 곁에 있다.”라고 권고했습니다. 팔다리가 건강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인간승리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행복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그는 나로,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라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참된 만족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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