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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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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3-21)


돈은 돌고 돌기 때문에 돈입니다. 지폐 한 장이 내 수중에 들어오기까지 수없이 주인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폐마다 다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돈은 때가 묻고 꼬깃꼬깃해서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화폐가치가 높을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컨대 오만원 권 지폐가 아무리 더럽기로서니 쓰레기통에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 오만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얼마든지 물물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꾀죄죄할 수 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구겨진 지폐처럼 초라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돌고 돌아 구겨진 지폐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러실진대 하물며 우리가 천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 묻은 오만원 권보다 인간은 그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수십억 인구 중에서 ‘나’ 하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가운데 인간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분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목자가 100마리의 양을 가졌는데 한 마리를 잃었다.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그냥 남겨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들로 산으로 애써 다니다가 찾아서 어깨에 메고 즐겁게 집으로 왔다.” 
하나님은 이처럼 생명 하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99=1 또는 99<1의 계산법이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하나쯤은 있으나마나 하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정통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누구와 바꾸겠느냐? 내 눈에는 네가 진주보다 더 귀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가치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 각 개인의 머리카락을 다 세고 계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결국 그 사랑의 표시로 자기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개개인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의 가치입니다.
아흔아홉과 하나의 가치를 비교해 보면 도저히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는 하나지만 아흔아홉은 하나의 아흔아홉 배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부족함으로 아흔아홉은 백이 못됩니다. 하나만 있으면 백이라는 만족한 숫자가 되는데 하나가 없음으로 아흔아홉이라는 불만족한 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는 아흔아홉의 운명을 가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지가 다 성해도 손가락이 하나만 없어도 불구자입니다. 누구도 그 사람을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육체의 소유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흔아홉이라는 수는 불구입니다. 처음부터 아흔아홉이라면 모르겠지만 백이었던 것이 아흔아홉이 되었다면 그것은 병신입니다. 여기에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한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니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기 전에 자기 스스로 자기를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냔 말입니다.
돈 앞에서는 한 없이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울고 웃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바로 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족할 만큼 돈이 없다는 것, 쓰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만큼 돈이 없다는 것, 아니 그렇게 돈을 벌 능력이 없기도 하고 또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는 것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단 돈 몇 푼에도 사람 목숨 하나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보다 나은 직장을 구하는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아마도 부모가 남겨놓은 유산이 좀 있었던 가 봅니다. 부모의 유언이 따로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은 장남이 다른 형제들보다 두 몫을 더 유산으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장남이 양보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몫을 양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나마 부모가 이미 죽었기에 그 나눠야 할 몫마저도 독식하려고 하는 형제가 있어서 때로는 얼굴도 붉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도 바로 그랬습니다. 아마도 형이 그 유산을 독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당연히 재산으로 인한 분쟁이 있다면 이건 마땅히 장로들에게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왔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들로부터 어떤 결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로들의 판결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기에 예수님께 또 다시 중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겠습니까? 더욱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 탐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하소서 하는 이 동생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가 돈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욕심을 낸다는 것은 곧 자기 몫 이외의 것을 바라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 할 몫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 양에는 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몫을 받지 못했다면 장로들의 판결에 의해서 아주 손쉽게 해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형으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 자기 몫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적다고 더 나누어 달라고 하니 이걸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동생이 달라는 대로 그냥 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버지가 따로 유산을 나누어주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땅연히 율법을 따라 몫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다면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재산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몫이 적다는 것을 보아 어쩌면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유산을 나누어 받았는데 내심 자기가 바라던 것보다 적게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형이 동생 몫까지 가로챈 것이라면 예수님이 이렇게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동생 말처럼 네가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하시면 끝입니다. 그런데 나는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니라는 말을 통해 주님은 이 사람이 사실은 욕심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으로서는 당연히 부모가 물려줄 것이 있다고 할 때 자기 몫을 받고 싶어 하겠죠. 하지만 자기 몫을 벗어나 더 받고자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재산 때문에 형제 자매간에 의가 상해서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는 집안들이 있지를 않습니까? 결국 형제자매보다도 돈이 더 좋다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빗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보다도 돈이 더 귀하고 사람과의 화목보다도 돈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삶의 풍조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어디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까?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고 말들을 하지만 여전히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탐심은 물리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탐심이라는 것은 내 몫을 벗어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몫 이상을 바란다면 그것이 바로 탐심이요 욕심입니다. 우리는 땀 흘린 만큼 거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그래야 땀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분량 이상을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만찬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 옆에 앉은 가룟 유다가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림들을 보면 돈주머니를 쥐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앞에 놓인 포도주 잔이 넘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잔은 그대로 있는데 가룟 유다의 잔만 넘어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한 가지 돈주머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살인강도가 생겨나고 돈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하고 이혼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향락에 빠져들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사업가도 돈만 보고 사업하면 문제가 되며, 정치가도 돈 때문에 이권에 개입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교육계도 돈 때문에 정도를 벗어나면 백년대계가 무너집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이렇게 마음속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화장을 하지만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해서 아름답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들면 아무리 진한 화장을 해도 신통치 않듯이 마음의 건강과 육신에 병이 들었다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탐욕으로 병든 마음은 아무리 치장하여도 주님 앞에선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가도 사업가도 교육가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선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만 바라본다면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므로 분명 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 있음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얻은 우리가 어찌 보면 돈 없이 못 사는 인생이라고 해도 그 돈에 매여 돈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이나 그 누구와도 화목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오늘이 있기까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이 부자는 농사를 이주 잘 지었습니다. 이삭이 흉년이 들어 어려울 때 오히려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100배나 거두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사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그래 창고를 더 지었습니다. 크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곳간마다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평안히 먹고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생명은 그날까지였기 때문이요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그가 수고하고 거두어들이고 헛간을 넓혀 짓고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했던 그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면 우리는 이미 과거를 지나 미래를 향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마지막 날로 알고 살아온 사람도 있지만 아직도 먼 훗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늘이라는 삶도 과거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즉 과거가 화려하였건 수치스러웠던 간에 과거를 딛고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없이는 오늘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이 만족할만한 날들이었느냐 불만족스러운 날들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가 만족스러웠다면 내일도 만족한 날이 되도록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가 못마땅하다면 내일은 만족한 날이요 마땅한 날이 되도록 오늘을 살아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수고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가끔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만큼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집, 우리 회사,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요즘은 교회조차도 우리 교회가 유행입니다. 그래서 우수개 소리로 교회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 교회요 다른 하나는 너네 교회라고 합디다. 그런데 막상 정말 우리라는 말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나와 같이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돕는 배필로서 지음 받은 인생들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만 스스로 도울 뿐 아니라 함께 도와야 합니다. 이 부자만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렸을까요? 마땅히 그의 밑에서 일하는 종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때를 따라 돕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기도 땀을 많이 흘렸겠지만 몇 년 두고 쓸 만큼 거두어 들였다면 적어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더욱 농사라고 하는 것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오늘이야 트랙터라도 있지만 엘리사 같은 경우는 오죽 땅이 좋으면 밭을 가는데 열두 겨리 소 즉 소 24마리를 한데 묶어서 땅을 갈겠습니까? 그럴 정도인데 혼자 힘으로 되겠습니까? 거기다가 아무리 수고하여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그 많은 것을 거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셨기에 또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오늘이 있기까지를 잊어버렸습니다. 많은 것을 거두기까지 수고한 사람들 함께 웃고 웃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자를 도왔습니다. 부자와 함께 했습니다. 

어제 그제 우리 교회는 김장을 담갔습니다. 이웃 교회 한 집사님이 배추 120포기를 기쁨으로 주셨습니다. 사실 배추를 씻고 절이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누가 일할 것인가 염려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면 나도 한다는 마음으로 나섰는데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와서 수고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분 같이 몸이 아픈 분들입니다. 때로는 내 몸도 가누기 힘든 분들인데 그 분들이 함께 수고를 하면서도 얼마나 싱글벙글 인지요?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괜히 내가 사다가 하자고 해서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고요. 

그래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라고 오히려 권사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복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냐고요. 어제 절인 배추를 씻고 김장을 담는데도 많은 분들이 함께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대신 나와서 함께 땀을 흘려준 자매로부터 시작해서 남녀 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 할 것 없이 많은 분들이 함께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래요 오히려 힘이 들 텐데도 함께 동참하신 분들, 아픈 몸을 가지고도 힘쓰고 수고하신 분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의 그 수고를 하나님이 갚으실 줄 믿고 그 모든 아픔을 치료하시고 더 복되고 좋은 것으로 그 수고한 삶을 채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배추를 가지러 가서 보니까 배추가 얼마나 실하고 좋은지 몰라요. 완전 무공해 배추입니다. 이건 무공해라고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벌레를 올려 논 그런 배추가 아닙니다. 여기 저기 벌레 먹은 자국도 선명합니다. 그런데 같은 밭인데도 아주 크고 탐스럽게 잘 자란 배추도 있고 아주 자그마한 배추도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요 결국 우리들의 모든 수고도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거기서 또 하나 배웠고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한다면, 함께 마음과 뜻을 합쳐서 수고하는 그곳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함께 땀을 흘린 사람만이 보람을 누리는 것이요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실 때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 우리는 함께 가는 자요 더불어 수고하는 자요 다 같이 힘을 합하게 될 때 이 부자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도록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들의 뒤에서 등을 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처럼 많은 것으로 거두고도 남는 귀한 역사가 저와 우리 모두 위에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앞으로의 삶입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받아 홀란드로 “순례의 길”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암스테르담과 랑덴에서 얼마동안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자(1558)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청교도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고국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1620년 9월 29일 영국의 청교도들과 승무원 6명을 포함하여 총 101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호리어스항을 떠났습니다. 2개월이 넘는 모진 고난의 항해 끝에 1620년 11월 9일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카드 만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언의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면서 거의 반수가 괴혈병, 폐렴 등의 질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1621년 2월 28일까지 50명이 세상을 떠나고 봄이 오기 전까지 하루에 2, 3명씩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개혁의 의지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다는 일념으로 윌리암 브래드포드의 지도 아래 정착을 시작하여 열심히 개척하였습니다.
1621년 3월 이후에는 인디언들과 청교도들 사이에 분쟁도 있었으나, 상호 협력 및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후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와 밀, 경작법 등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청교도들이 양식이 부족해서 일주일에 3일씩 금식을 하며 어렵게 지낼 때는 인디언들이 짐승들을 잡아다 주기도 해서 연명해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그들이 심은 옥수수와 보리, 밀 등이 풍작을 이루었고 가을추수를 하였습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청교도들은 지도자 브래드포드의 지도를 따라 인디언들과 함께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축하하기로 하고 인디안 추장 마사소이드를 초청했습니다. 마사소이드 추장은 90명의 용사를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날 청교도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가서 많은 칠면조를 잡았고, 인디언들은 사냥을 해서 다섯 마리의 사슴을 잡았습니다. 그 이유로 추수감사에는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렇듯 청교도들이 귀한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는 하나님 신앙이요 둘째는 그들을 도왔던 인디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 역시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함께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며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이렇듯 소중합니다. 그 고마움을 모른다면 어찌 짐승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리석게도 부자는 이웃도 하나님도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단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는 심지 않고 거두지를 못하며 땀 흘리며 수고하지 않고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지 못한다는 진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 마음이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심었기에 거두었습니다. 땀을 흘린 만큼 거두었습니다. 그랬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함으로 다시 심어야 하며 함께 수고하는 자들과 함께 기쁨도 나누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저 자기 혼자서만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보다 더 허망한 데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이처럼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기껏 수고하고 기껏 거두어들이고 기껏 창고마다 채워놓았는데 그것을 하나도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 이처럼 속상할 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그 많은 소득을 거둘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그는 잘 나갔습니다. 많은 종들이 한 마음으로 수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도우셨습니다.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날씨도 붙잡아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암흑입니다. 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오늘까지는 잘 했는데 내일을 위한 또 하나의 준비를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수고한 자와 더불어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뿐이었습니다.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함께 수고한 자들의 공을 잊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요즘처럼 어려운 때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려움이 계속되는 형편입니다. 예전 우리가 당했던 IMF사태를 유럽의 나라들이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가 되어 그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우리네처럼 수출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네 경제도 많이 어렵다보니 성도들로서도 함께 그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럴수록 더욱 우리가 기억할 것은 힘들기에 더 나누어야 하는 것이요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부터도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힘든만큼 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절약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절약하는 것과 줄이는 것은 다릅니다. 절약이라는 것은 낭비를 줄이자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꼭 써야 할 것까지도 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혼돈했습니다. 그래서 나누는 것을 줄였더니 그러면 그만큼 나아졌느냐 하면 아니올시다. 여전히 그만큼 모자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10년 전 자립하지 못하던 시절 하나님 앞에 작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나누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워진다고 해서 우리는 이웃을 향한 마음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또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재물을 쌓아둔 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보내어 사르밧 과부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빵을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난 다음 너를 위해서 만들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에 밀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 쓸 일도 바쁘다고 내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해서 농사 지을 식량을 비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심지 않으면 무엇을 거둘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어려움을 나눌 때 하나님이 또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어려움을 나누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많은 성도들이 함께 동참해서 김장을 위하여 친히 수고하도록 만들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마음을 담아 이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또한 심으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나만 아는 사람도 문제지만 과도히 아끼는 것도 문제임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 6: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적어도 재물이 우리 주인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교제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마땅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물 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재물 때문에 아버지 품을 떠난 아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기에 재물을 위해서도 우리는 결코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어리석은 부자는 그날이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의 날을 더하시는 동안 우리는 그 날이 끝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이 땅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우리가 심고 거두었듯이 또다시 내일을 위해 심는 자가 되어야 하고 땀을 흘리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비전의 사람이요 우리 발로 그 좌로 우로 행하는 믿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자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요한 자로서 오늘을 살아 내일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 폭포의 물을 맛있게 마신 후 돌아서는 순간, 포이즌(POISON)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독을 마셨다는 생각에 갑자기 창자가 녹아내리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의 말인 즉 “선생님, 포이즌은 영어로는 독이지만 프랑스어로는 낚시금지라는 말입니다”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아프던 배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아는 상식이나 믿음은 몸까지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이런 현상을 플라세보 효과라고 합니다. 반대로 아픈 사람이 약의 효과를 의심해 약효가 떨어지는 현상을 노세보 효과라고 합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른 선택, 바른 지식, 바른 믿음이 삶을 결정합니다. 
여기 어리석은 부자를 보고 우리는 “어리석기도 하지” 하며 혀를 찹니다. 한데 바로 그런 어리석은 자가 바로 우리들은 아닐는지요?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하나님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색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하게 채우시는 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부자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의 섬김을 통한 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시는 기회의 사람 복된 선택의 사람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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