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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생각하자 (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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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생각하자
히브리서 3:1-6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좋은 선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은 바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신 분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무계획하게, 아무 생각 없이 이루어진 거쇼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치 아이가 연필로 낙서를 하듯이, 아니면 블록을 쌓듯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세계에는 창조 이래 지금까지도 아주 분명한 창조질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를 무시했을 때에, 자연계에 나타나는 엄청난 자연재해들을 볼 때마다, 아하 하나님의 계획이나 생각을 무시하면 안되는구나! 하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그리고 말씀으로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도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성품을 받았기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와 삶의 내용과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철학자 데카르트도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곧 생각하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존재가치가 달라지고, 삶의 내용과 질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말이 있는데,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을 낳고, 성격은 운명을 낳는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여러분의 삶의 시작은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생각할 때 행동하게 되고,, 행동할 때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사람의 성격과 태도가 되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여러분의 삶이란 것은 결국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의 내용과 질도 달라집니다.

‘로저 베니스터’라고 하는 중거리 육상 선수가 있습니다. 한 때 육상선수들은 오랫동안 사람이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일 4분’이란 표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육상경기마다, 최고의 육상선수들이 1마일을 달리는 데는 4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장벽이 영국의 육상 선수 ‘로저 베니스터’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로저 베니스터가 4분대 기록을 깨보기 위해서 자신의 달리기 방식과 전략을 바꾸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로저 베니스터는 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달 동안 자신의 달리는 패턴을 바꾸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답니다. 그 결과 1954년, 로즈 베니스터는, 처음으로 4분 안에 (3분 59.4)라는 기록으로 1마일을 달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저 베니스터는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져서, 결국은 육상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베니스터가 이 기록을 깬 후, 전 세계에서 최고의 육상 선수들이 4분 이내에 1마일을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니스터 이후, 중거리 달리기는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니스터의 경우와는 달리, 다른 선수들은 이제까지 달리던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바꿀 것이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 빨리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게되자, 중거리 육상 선수들이 이런 생각에 뒤따라 행동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이 움직일 때, 행동하고, 새로운 일을 하게 합니다. 삶을 다르게 바꿀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에 갔다가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몹시 더운 여름이었지만, 호텔은 에어컨이 있어서, 아주 시원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전이 된 줄도 모른 채, 자다가 숨막히는 더위로 뒤척거렸습니다. 그는 찌는 듯한 더위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서 창문을 열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깜깜한 어둠과 졸음 속에서 이리저리 더듬다가 창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려 해도 창문은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더위로 가뜩이나 짜증이 난 그는 창문을 열다가 그만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리고 그는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들어옴을 느꼈습니다. 비록 ‘유리창은 깨졌지만 바람이 들어오니 살 것 같구먼.’이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기분 좋게 잠을 청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어젯밤에 깬 유리창 생각이 나서 창가로 다가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리창은 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놀란 그가 앞을 보자 큰 거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무판만이 흉하게 걸려있고 바닥에는 깨진 거울 조각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한국인 여행객은 유리 창문을 깬 것이 아니라 잠결에 그만 거울을 깬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결인지라 시원하게 느겼고, 펀안하게 잘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생각하기에 따라서 사람은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각해주시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도무지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사더라도 깊이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요즈음은 점점 더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민족은 망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토록 고난과 역경을 계속해서 치르고 있는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독재정권에 시달리고, 빈부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남북통일이 힘이 드는가? 그 이유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해서 그렇다.’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반짝 생각일 뿐입니다. 한 순간 어떤 자극에 흥분하고 요동을 합니다. 무엇인가가 될 것처럼 보이다가도, 잠시 후면 더위에 시금치 늘어지듯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도, 육적인 생각에만 얽매어 있습니다. 생각에는 육적인 생각이 있는가 하면, 영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6절에서 로마 교인에게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생각에는 육신의 생각이 있고, 영적인 생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을 좇아서 하는 모든 것이요, 영적인 생각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인에게 롬 8:5절에서 말하기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육신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맛 있는 음식만 찾아다니고, 소위 명품이라는 것과 비싼 옷에만 관심을 기지고, 세상적인 즐거움에만 탐닉을 하게 되고, 육신적인 건강만 이야기 합니다. 육신의 일만 생각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보다 연약한 이웃이 당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무관심 합니다. 자기의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이웃의 답답한 사정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무관심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왔는지 여러분의 믿음생활, 교회생활을 한번 겸손하게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은혜를 받는 교회에 필요한 것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신 적은 있습니까? 다윗이 자손만대에 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는 이처럼 좋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은 천막 가운데 계신 것이 괴로워서 야훼를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근심을 하고, 헌신하는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육신적인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기대와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에, 절망하고 낙심하고, 시비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것이 도를 넘으면 우울증과 불안,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언젠가 한 인기 여배우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유는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누리게 된 인기와 명예 그리고 생겨난 재산을 유지하는 일과, 사람들에게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 등 때문에 생겨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서, 우울증을 가지게 되었고,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끔 나타나는 인기 있는 연예인들의 자살하는 사건을 통해서 화려한 연예인의 생활 이면에 있는 어두운 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작정 화려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영의 일을 생각하려고 얘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하되, 영의 일을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공동체인, 주님의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라면, 마땅히 언제나 성령의 뜻이 무엇인가?를 겸손하게 물으면서, 영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의 법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법에 무관심한 사람과 영의 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못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자면, 모병관이신 예수의 명령에 관심을 가지고, 대장 되신 예수의 명령을 이루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좋은 군사는 자기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휘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자면, 십자가 군병의 대장이신 예수의 명령을 잘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러면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예수만 깊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생각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은, 믿는 모양은 있으나, 진정한 주님의 군사가 되지 못하고, 어설픈 연극을 하거나,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긔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 사람과 다른 차원의 생각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정신을 집중시키고,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붙들어 놓으라. 곧 고정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타노에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눈을 고정시키다, 마음을 어디엔가 붙들어 매어 놓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정신을 다른데 쓰지 않고, 한 군데로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는 바울의 말은, 예수님께 여러분의 정신을 온전히 집중하고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시고, 오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사렛 사람 예수만 바라보고, 예수의 정신을 의식하고, 예수께서 보여준 삶만 생각하고, 그 모습 그대로 닮아가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와 온전히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예수가 큰 꽃이라면 나는 작은 꽃이 되고자 노력하고 사모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감정적인 차원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고, 생각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모든 생각이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닮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생각은 세상적이 되고, 육체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잘 생활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호기심의 노예가 되어서, 정욕을 따르고, 이생의 자랑에 휘말리면, 즉시 사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겸손하고 정직히고, 매사가 신앙적인 사람이었지만, 어는 순간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영니의 벗은 몸을 보고, 호기심의 노예가 되고, 안목의 정욕을 버리지 못하자, 간음죄를 짓고, 지은 죄를 숨기려고, 살인을 교사하는 죄까지 짓고 맙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그 영혼이 깨어 있어야만 하고, 한 순간도 예수의 마음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너무도 쉽게 부정적이고, 정욕적이고, 파괴적인 죄의 소욕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만 생각을 하세요.

물은 근원이 어디냐?에 따라서 흐름과 역할이 달라집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이나,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같이 아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에서 나오는 물은 맑고, 흐름이 계속되어, 나중에는 큰 강을 이루고, 그 속에 수많은 생명체를 품고 흐르면서, 필요한 곳에서는 발전시설을 통해서 전기를 공급해 주고, 수많은 사람들의 식수원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넓은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하지만 조그만 골짜기나, 아니면 집터 옆에서 작게 솟아나는 샘물은 겨우 사람의 목을 적셔주다가도, 한 순간 햇볕이 나고 가뭄이 들면 곧 말라버리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이나, 자기중심적인 얕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가뭄이 들면 곧 말라버립니다. 그러면 나도 힘이 들고 남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 예수만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생각은 가물어도 마르지를 않고, 내게 만이 아니라 이웃에게까지도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고, 도움을 줍니다. 예수에게서 발원한 샘물은 어떤 형편에서도 계속 흘러나오는 샘처럼 끊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흘러나올수록 더 큰 힘과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인에게 ‘예수만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과 땅만을 쳐다보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앞, 가데스바네아란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장차 들어가서 정복할 땅인 가나안 땅을 12명의 정탐꾼이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보고회를 가졌는데, 10명의 정탐꾼은 보이는 땅과 성읍과 아낙 자손만을 보았습니다. 가나안이라는 현실만을 본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결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에서는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나안을 정복하겠다고 요단강을 건너가면, ‘우리는 가나안 땅에서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진입불가가 보고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땅만을 보지 않고,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약속을 믿었고,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신 야훼의 역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보자, 가나안 땅은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면, 능히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을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과 세상적인 안목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분이 감당해야만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깊히 생각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항상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믿음여정을 달려가면서 전혀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산다면 여러분은 지금보다는 더 의미 있고,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나사렛 사람 예수의 생각을 여러분의 판단의 근원으로 삼고, 겸손히 깊이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결국 영원한 생명과 참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참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한번 가만히 여러분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정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무엇을 얼마나 생각하고 사십니까? 구체적으로 하루에 얼마나 나사렛사람 예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니까? 하루에 몇 번이나 예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즐거움을 맛보십니까?

하루 24시간 가운데, 단 몇 십분, 기도하는 시간 가지고 나서는, 그 기도시간도 예수님의 뜻을 묻고, 들으려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주장만 마치 성명서를 발표하듯이 해놓고는, 나머지 모든 시간은 자기마음대로 쓰는 것이, 바로 나는 아닌가? 한번 살펴 보시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회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항상 세상의 이런 저런 생각과 온갖 잡념이 나를 지배할 ,뿐 성령께서 내 속에서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은 아닌가? 살펴보세요. 살기는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고, 거룩한 은혜를 구하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믿음 자세를 가지고도 아무런 신앙적인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빙자한 미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심에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만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의 마음을 전적으로 따라가고, 예수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닮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에, 여러분모두가 바른 생각, 바른 판단, 바른 결정을 하게 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위에는 그렇게 사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생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은 자기가 하고, ‘주님은 내 결정대로 해주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생활 하기에는 편안할지 모르지만, 복음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의 마음도 아니면, 바울이 그르친 믿음생활도 아닙니다. 잘못된 믿음의 전형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이것을 훈련하세요. 
오직 나사렛 사람 예수만 생각을 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하세요. ‘내가 만일 예수라면 이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물으면서, 순간순간을 진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뜻만을 찾고, 따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생명력과 영향력은 더 빛나고,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평안이 충만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진정 예수의 마음을 깊히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과 자유를 얻습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는데 부족하지 않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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