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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 (눅 13:10-17)

첨부 1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
누가복음 13:10-17 

인형을 무척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아이에게 묻기를,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녀는 잠시 침묵을 하고 있다가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소녀는 아저씨에게 말하기를,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그 인형을 보고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저씨는 “암, 그러마.”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는 아저씨에게 말하기를,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해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저씨는 아이에게 “어째서 이 인형이 제일 좋으냐?”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가 대답하기를,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하더랍니다. 자기가 사랑 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사랑한다니! 얼마나 고운 마음입니까?

본문 말씀을 보세요. 가장 비참한 한 여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녀는 열 여덟해 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꼬부라진 허리를 가지고 살아야만 했던 여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척추에 장애가 있어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18년 동안을 허리가 꼬부라진 채로 살아야만 했던 여인입니다. 참으로 오랫 동안 병을 앓아야만 했던 여인입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척추장애만 이 아니라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형편이 그러니 누구도 이 장애를 가진 여인의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지만,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여인의 가족까지도 치료하겠다는 소망을 포기하였고, 이웃이나 아마도 동리의 장로들까지도, 이 여인에게 어떤 소망을 두고 기다린다거나 그런 안목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절망적인 사람,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 더 하여 여인이 귀신까지 들린 것입니다. 몸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그러니까 영혼까지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갈릴리 지역에서 한창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시던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러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바로 18년 동안 귀신이 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형편에 있는 여인을 보시고는, 여인에게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는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 났소!’라고 말씀하면서, 여인의 병을 고쳐줍니다. 그러자 질병을 고침 받고, 귀신의 억압에서부터 해방을 받은 여인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 모양을 본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문제로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기를,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말하기를,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자,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회당에 있던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모두 기뻐하였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면, 안식을 규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것은 자명한데도,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무리 앞에서 귀신이 들려, 18년 동안을 허리가 꼬부라진 채로 살아온 여인의 질병을 고쳐주고, 여인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주고, 질병을 치유해주신 일로 인하여, 회당장에게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회당장은 이 여인에게 ‘다른 엿새 동안 병 고칠 날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병을 고치느냐?’라고 걱정을 하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병을 고치는 일을 한 나사렛 사람 예수에 대하여는 직접적으로 야단을 치지 못한 채로, 안식일에 회당 집회에 참여하였다가, 병고침을 받은 여인에게만, 병을 고칠 날은, 안식일이 아닌 다른 엿새도 있으니까, 구지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말고, 다른 날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날, 고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회당장이 한 말은, 사실 겉으로는, 여인과 무리를 향하여 한 말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 날 병을 고치느냐?’라는 항의를 완곡하게 돌려서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귀신이 들려서 질병을 18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여인을, 비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도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무리가 보는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주고, 병을 고쳐 주신 데에는,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귀신이 들리고, 중병이 들어서, 몸과 인격과 영혼이 망가진, 그래서 사람과 가족들에게까지도 버려진, 쓸모 없는 여인으로만 보지를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본문 16절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을” 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족장 아브라함’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 들려, 병든 여인을, 가진 재물로 평가하거나, 여인이 소유한 건강이나 아름다움이나, 여인이 속한 집안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가진 지식이나 인격, 선한 행위 등으로 평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족장 아브라함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의 눈으로만 보았다면,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충만하시고, 끝까지 인간을 긍휼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귀신 들려 허리가 꼬부라지는 병으로 18년 간 동안이나 고생하는 여인도,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귀신을 쫓아내주고, 병을 고쳐주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런 불행한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여인에게는 사람들이 흠모 할만한 돈도 지식도 인격도 없지만, 여인의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와 인도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더러운 귀신이 붙잡고 있고, 병이 심한 여인일지라도, 그녀는 분명히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웃 가운데 피부색이 나와 다르다거나, 나보다 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무시하거나, 천하게 여기거나, 차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역시 비록 피부색은 나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지능이 낮아서 현실적으로 바보의 수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비천한 존재는 아닙니다. 이유는 그 사람도 역시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고, 지금도 선하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부색깔 때문에, 가진 지능지 수 때문에, 가진 장애 때문에 사람을 멸시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잘 믿는 사람이라고 간증을 해도, 실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이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이끄심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 기준으로 잴 수 없는, 놀라운 내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도 내면의 가치는 굉장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미워하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무시하고 사는 사람 가운데, 이 여자보다 더 가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 동안을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고, 귀신이 들려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은 괴로워서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고 사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의 눈과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동안 그런 어리석음을 범한 적이 없었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겸손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남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지하철을 전세라도 낸 것처럼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 아버지를 깨워서 아이들을 좀 조용히 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기를, “놔두세요. 지금 병들어 죽은 아이들 엄마를 장례 치르고 오는 중입니다.”라고 합니다. 그 남자의 그 말 한 마디에, 한 순간 아이들을 보는 시각이 확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큰 슬픔을 당한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버릇없는 아이들이라고 보고 미워했는데, 엄마를 잃은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니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순식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확 바뀌었습니다. 현실은 바뀐 것이 없지만, 마음의 태도를 바꾸니까, 모든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현실이 바뀌지 않아도 새로운 각도에서 바바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안목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집에서 얼마 동안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손님이 어느 날 네 아이의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대답하기를, “네 맏아들이지요,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라고 하더니, 곧 부인하면서 말하기를, “참 그게 아니지,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딸입니다. 남자아이들과 다릅니다. 키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재롱을 떨고 귀여운 짓을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요.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 나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또 조금 있다가 어머니는 손님에게 “아니네요,”라고, 다시 부인을 하고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다시 이제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을 하는데,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을 해보니까, 네 자식이다 사랑스럽지만, 그가운데서도 소아마비에 걸려서 장애가 있는 아들이 제일 사랑스런 것입니다. 아무리 남들이 장애가 있다고 하고,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머니의 눈에는 장애가 있는 아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똑같은 아들이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서 바라보는 것과 어머니로서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딸이지만 남편이 바라보는 것과 어머니가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원인은, 상대방에게 있지 않고,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이 시간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기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에게 손해를 준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기적인 눈을 버리지 못하는 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네 탓’ 때문이라고 하며 삽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당신의 행동을 고치시오. 그러면 내가 사랑하겠소.”라는 말만 합니다. 그러니 평생토록 누구를 사랑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사랑 받을 만한 행동 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사람에게는 평생을 기다려도 사랑할 기회가 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마음과 태도를 바꿔서, ‘저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과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먼저 사랑할 때, 사람은 변합니다. 내가 건강한 영혼의 눈을 뜨고 보면, 모두 아브라함의 딸이고 아들입니다. 그동안 나만 모르고 산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딸과 아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고쳐야만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젊은이가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으면서도 저쪽에서 자기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도 궁금하면 미안하지만 “자네 누구냐고, 이리 가까이 와 보라고”해서 가까이서 보고, 자세하 설명을 들어야만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눈이 어두워지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의 눈을 고쳐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고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6:22-23절에서 말씀하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한 눈’이라고 할 때, ‘성하다’는 말은, ‘단순하다’, ‘관대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눈, 관대한 눈’을 가지면,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단순하다 할 때는 초점이 하나인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텔레비전을 보자면 텔레비전에 많은 채널이 있지만, 어떤 한 채널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좋은 눈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돈이라는 관점에서만 봅니다. 한국 한 남자 배우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어서 한류가 형성되니까, 그 배우의 한류 효과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들이, 돈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경제적 효과가 수백억에서 수천억대 라고 계산을 한 것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좀 계산적이지 못한 저로서는 황당하다는 느낌이 먼저 왔기 때문입니다. 돈이란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영혼의 좋은 눈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돈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손해냐? 이익이냐? 만 따지는 사람은, 영혼의 눈이 병든 사람입니다.

귀신 들리고 몸이 뒤틀린 채 18년 동안 살아온 여인이라면 아마도 경제적인 가치로 따지면, 단 10원의 가치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가치로만 본다면 그런 사람을 구태여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병을 고쳐 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는 여인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미 오랜 질병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형편없이 망가진 여인에게서, 귀신이 들려서 더럽고 황폐해진 여인의 영혼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여인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급할 것이 전혀 없는데, 왜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병을 고치는가? 라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회당장의 이 말은, 이 귀신 들린 여인은, 사실 자기의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가축보다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축은 죽으면 안되니까, 안식일에라도 우물에 빠졌으면 건져내야 하지만, 이 여인은 안식일에 죽으면 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비록 귀신이 들리고, 18년 동안이나 허리 꼬부라진 병으로 고생을 하는 여인이었지만, 버려두지 않으시고,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여인에게서 쫓아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규정보다는 더 귀한 ‘천하보다 귀한 생명’으로 보셨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이 있는 줄 알면서도 안식일에 여인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나는 잘 하는데 상대방이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고 핑계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게시록 3:17-18절에서 말씀하기를,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에게 권면하기를,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바른 태도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상대방의 나쁜 태도에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된 말에다 자기 삶의 중심을 맞대어 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미워하면서, 자기도 그런 사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태도에 따라서 자기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웃들 속에서, 이웃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이웃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바라보고, 이웃을 귀중히 여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성 프랜시스가 나병환자를 얼싸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나병환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이웃을 향해서, 미운 사람을 향해서, 심지어 원수를 향해서 까지라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영이 함께 하는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차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3:10절 이하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인데,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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