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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십자가 (마 1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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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십자가
마태복음 16:13-28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원, 곧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이란, 다윗 왕조가 멸망한 이후 예수님 시대까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이제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지라, 이런 이방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족장 아브라함 이후 지금까지 지녀 온 선민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위엄을 지키고, 세상 속에서 오직 유대인만이 야훼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보내주기로 약속하신,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야만 합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나라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메시야에 대한 대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불만 부치면 언제든지 불이 붙을만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간절하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더 찾듯이, 나라가 힘들면 힘들수록,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꿈과 함께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건을 쓴 얼굴’이라고 표현하는, ‘유대인만 가진 편견’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만 가진 편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1) 유대인의 강한 선민의식입니다. 오직 자기들만 야훼의 자녀이고,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편견입니다. (2) 모세를 통하여 받은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와 회당예배를 통해서 야훼께서 자기들만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편견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증거인 할례와 지키지도 않는 율법만 붙들고, 자기도 힘들고, 나도 힘들게 하는 고집과 독선을 부린 것입니다.  

이런 점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말씀을 배웠고, 누누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이 무엇인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서, 제자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지극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 선생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혁명을 일으켜서, 새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끼리 자리다툼을 한적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께서 예수님에게 부탁하기를, ‘장차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는 요청을 한 것 때문에 제자들 간에 다툼이 벌어졌던 사건이 바로 그 예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자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까지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1:6절에 보면, 이제 곧 승천하실 주님께 제자들은 질문하기를,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느 때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를 바라보는 것도 여느 유대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서 성전 건물에 대하여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하는 성전은, B.C.19년경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반쪽 유대인인(에돔사람) 헤롯 대왕에(마 2:1절) 의해서 착공되어 거의 40여년 동안 지어진 것으로, 겉으로는 제 2성전을 개축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헤롯이 거의 신축했다고 할 정도로 증개축을 한 것이기 때문에 헤롯성전 혹은 제 3성전이라고 불리는 성전입니다.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헤롯이 지은 성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기에도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고, 마치 눈 덮인 산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그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도취되어 진정한 성전이 무엇인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마태복음 16:13-2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의 꿈과 제자들의 꿈이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인,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보시고, 당신이 창조한 전 우주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유대인은 오직 자신들만이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가 당신의 피조물이고, 당신의 나라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에 대한 율법적 신앙행위만을 강조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을 우선시하고, 그것만을 좇아가기 바빴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건물과 의식이 중심을 이루는 단체를 만들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고백하는 믿음공동체인 교회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고 놀라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으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후 70년 유대인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에 의하여 그 화려하고 장엄했던 헤롯성전이 돌 하나 돌 위에 놓이지않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이처럼 건물로서의 성전은 무너지면 그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교회인 믿음공동체가 살아 있지 못하면, 아무리 굉장한 성전이라고 할지라도 건물은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기를, ‘나는 제사보다 인애를 더 원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애를 베푸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심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의, 곧 예배의 형식과 제사 의식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이 더욱 중요함을 구체적인 생활로 보여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썩어질 것에만 집중하고, 찰나적인 것 때문에 갈등하면서 사는,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기보다는, 영원한 것과 생명을 얻게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셨던 나사렛 예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생각과 뜻을 알고, 그것을 따라가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항상 이 때와 예수님의 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와 지금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때와 그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찌보면 이때도 그때와 동일하다는 생각은 않드십니까?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도 보면, 매우 교회중심이요, 예배의식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건물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가 크고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의 건축을 꿈꾸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배당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나아가서 예배드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결단하고, 실천하는 자리로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거룩한 친교를 나누는 자리인 예배당을, 아름답고, 가치 있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불신자까지도 펀안한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건물에 대한 집착과 건물 사랑이 우선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음적인 우선순위가 전도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교회마다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고, 본질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전통이니까’라고 하면서, 왜곡된 전통이 그대로 복사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의식과 신앙생활방법을 전통으로 여기고, 율법의 근본정신과 부합시키지 못했듯이, 지금의 교회에도 비본질적인 것들이 전통이라고 그냥 답습해 내려오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드려지면서, 과연 이 예배가 복음적인지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선민사상과 성전과 제의 중심의 율법주의적인 믿음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대인과 동일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법관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은퇴하신 한 장로님이, 당신의 교회가 새 성전건축을 하려고 계획할 때, 정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말씀을 가지고 진지하게 조명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성경말씀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은 ‘성전건축 보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데 더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당회에서 건물은 지금 교회를 리모델링 해서 사용하면 충분하고, 오히려 장래의 지도자를 배출하고, 장차 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위한 교육에 더 집중적으로 투자하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그러자 다른 당회원들로부터 ‘당신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고 질타를 당했답니다. 다른 장로님들의 입장은 ‘교회건축을 번듯하게 해 놓아야,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가 성장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 교회도 대형교회가 되어 유명한 교회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논리였다고 합니다. 그런 논리가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장로님으로서는 그들과 맞서기에 수적으로 너무 열세여서, 나의 생각이 복음적인데 하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는 기사를 싱앙잡지에서 본적이 잇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속으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은 성전과 율법과 행위가 제일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진정으로 도모하는 ‘사랑과 인애의 법’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여러분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생각에만 고정을 시키고, 예수만 깊히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을 온전히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이루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외형적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면 물질적인 허욕과 안목의 정욕인 호기심과 찰라적인 이생의 자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적극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류한 이유도 바로 바른 가치관이 없었고, 영원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목회자도 교인들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철저한 자기부정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를 만들어서 자기 이름을 남기고, 자기가 영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크기 때문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핑계 하면서, 인간이 영광을 받으려고 한 결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에게서 여러분은 그런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지금의 바네야스라고 불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가 들은대로 ‘예 선생님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는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이 질문은 ‘너희들은 지금 나를 누구로 알고 따르는 것이냐?‘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선생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본문 16절에서 대답하기를,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본문 17-19절에서 베드로에게 축복하면서 말씀하기를,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니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칭찬을 하시면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을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시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틈타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고는,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릴 것이라는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바른 믿음을 가진 결과, 그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늘나라를 매고 여는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참으로 베드로가 바른 믿음을 가진 것 때문에 대단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복을 누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복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바른 믿음만 가지면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탄이라고 불리면서 야단을 맞는 역사가 본문에 나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베드로가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고,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예언을 들은 베드로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붙잡으면서까지 반대하고 나섭니다. 본문 22저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과에 싸여, 자기 천사들은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장 바른 믿음을 고백한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판단에 쌍수를 들고 반대를 한 것입니다. ‘안됩니다. 선생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다니요. 절대로 안됩니다.’

베드로는 한 순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한 인물입니다. 그런 베드로이기에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 치욕의 상징인 십자가를 져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으로는 예수께서 소유한 초월적인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당당하게 유다의 왕권을 장악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는, 베드로도 바른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기욕심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감당해야만 할 십자가를 버린 것입니다. 허욕을 버리지 못하면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세상적인 논리로 하나님을 대하고, 복음을 해석하게 됩니다. 세상의 논리로 보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베드로에게 잃어버린 십자가를 다시 찾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잃어버린 십자가, 놓아버리고 싶은 십자가’, 그것을 다시 잡아야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지만, 의식과 가치관은 세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복음도, 참 하나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복을, 단지 물질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해석한다면, 어떻게 진정한 복음의 진수를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적인 논리와 물질적인 시각과 인본주의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복음의 진정한 색깔이 이런데서 왜곡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라면 주님께서 원하는 참된 복음의 뜻을 발견하고, 참되게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에 대단히 열심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습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를 섬기는 중국인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방문했을 때, 말씀하기를, 지금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중국에 들어와 전하는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가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면서, 어떤 한국인 목사님은 복음이 아니라 도덕을 강론하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이 중국인 목사의 지적을 한국교회는 반드시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해석이 물질중심으로 흐르다보니,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슬쩍 내려놓고 있지는 않았는지, 사명의 십자가는 내려놓고 영광만 누리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마땅히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치고, 복만 구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허욕만 채우려하지는 않았는지, 이 시간 깊히 말씀을 묵상하면서, 반성을 하고,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겸손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 등 위에 내가 져야만 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 날마다 점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등 위에 여러분이 져야만 하는 십자가가 없거든, 어디서 십자가를 잃어버렸는지 살펴보시고, 잃어버린 십자가를 다시 찾아서 등에 지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본문 24절에서 말씀하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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