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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모님의 마음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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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마음
누가복음 15:11-2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예수님도,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참으로 성실하게 효자 노릇을 감당하고, 어머니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극단적인 예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창조주이신 분이 피조물에게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그 어렵고 힘이 든 순간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에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낍니다. 그만큼 나사렛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효자입니다.

성경은 이미 십계명을 통하여 부모를 공경할 것에 대하여 계명으로 말씀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이 세상에서 부모라는 이름만큼 숭고한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식을 자기의 몸에서 열달 동안이나 기른 후에, 생명을 걸고 잉태한 생명을 낳고, 수 십년을 정성을 다하여 길러주신 어버이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힘이 있고, 위대한 것입니다.

미국의 18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에게도, 좋은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실 것입니다. 링컨은 노동자이고, 배우지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가난한 형편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링컨의 어머니는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 주면서, 아들에게 바른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링컨이 아홉살 때에 링컨의 어머니는 눈을 감으면서 유언하기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새 어머니가 세 명의 아들을 데리고, 링컨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새 어머니도, 링컨에게 성경으로 가르치면서, 바른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양육을 했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자신의 전기를 쓰는 작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링컨이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할만한 조건을 한 가지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링컨에게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주셨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 이것이 바로 링컨을 위대하게 만든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은 모두가 위대한 분입니다. 그 분들의 늙은 것은 바로 여러분의 젊음을 위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겪어야만 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모든 질고는, 여러분을 정성껏 기른 후유증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것은 다 여러분에게 주시고, 이제 남은 것은 힘이 없는 당신의 육체뿐이고, 깊게 패인 주름살뿐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부모님의 마음이요,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에 관하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끝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녀에게서 소망을 찾습니다.

이처럼 어머니는 자녀에 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식에 관한 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의 인생을 가장 염려하고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 분이자, 가장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자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5:11-24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가운데에서도 유명한 ‘돌아 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내용을 보면,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 가운데서 둘째 아들이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신데,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나가 살겠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독립이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가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눠주고, 아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합니다. 아들은 집과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삽니다. 제 마음대로 산 결과 아주 망합니다, 본문에 표현된 대로, 돼지를 기르는 돼지치기가 됩니다. 유대인은 돼지 고기를 부정한 동물이라고 여겨서 안먹습니다. 그런데 부정한 동물을 치는 자리까지 지위가 떨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굶주려서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가지고 배를 채우고자 해도, 배를 채우지 못하는 형편에 이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최후를 여러분에게 비유를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고, 교훈을 하십니다. 많은 인생이 하나님 곁에 있기를 싫어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처럼, 오히려 아버지의 곁에서 멀리 떠나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곁을 떠난 사람이 맞게 되는 결과는, 고통과 질고와 사망입니다. 결국은 사람다운 삶을 원했지만, 동물과 같은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 본 비유가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본 비유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아들을 보낸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 보낸 후, 한 시도 편한 적이 없습니다. 잠도 편하게 자지를 못합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 편한 마음으로 먹고 마실 수가 없었고, 뿐만 아니라 어느 새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동구 밖을 주시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다가 말고는, 둘째 아들의 생각에 잠길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스스로 집을 나가버린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날부터, 아버지는 말썽꾸러기 둘째 아들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기 한 번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집을 나가는 아들은 아무리 말려도 나갈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냥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와 싸우기라도 하고, 집을 나갔다면 돌아오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만 돌아오기를 소망하면서 보내준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보내면서 기다리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 최대의 사상가로,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꾸만 다른 길을 걸어거고 있는 아들, 어거스틴을 위하여 끊임없이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18세부터 28세까지, 세상적인 것에만 탐닉해 있었을 동안에도, 어머니 모니카는 결코 소망을 잃지 않고,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29세 때에 모니카의 곁을 떠나서 로마로 갔을 때에도, 모니카는 아들을 위한 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았고, 아들이 황제가 운영하는 대학의 수사학 교수가 되어 밀라노로 갔을 때에도 모니카는 여전히 아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모니카의 이런 끈질긴 기도는 결국 밀라노에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밀라노 교회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니카처럼 진정한 부모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진정한 사랑은 겸손히 부모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견손하게 부모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습니다. 이보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돌아오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아버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본문에서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아들로서는 자격이 전혀 없지만, 품꾼으로는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이 아버지의 곁을 스스로 떠난, 이방 땅에서 겪은 고생을 통하여 철이 들은 아들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품꾼으로는 받아주실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결국 자신의 처참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과거에 아버지께 죄를 짓고 떠나갔다가, 망해서 어쩔 수가 없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아들의 심경은 매우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가 되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형편입니까? 눈이 빠지도록, 망부석이 될 것 같은 심정으로, 스스로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찬송가 315장의 작사자 엘렌 헌팅톤 게이츠가 너무나 잘 묘사했습니다.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돌아 와 돌아 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돌아 와 돌아 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받는 데서
돌아 와 돌아 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후렴)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효도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히 부모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악 된 자리에서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짓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서, 진실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효하던 자리에서 떠나서, 효도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신의 자리에서 떠나,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효도란 겸손하게 부모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를 근심시키던 자리에서 떠나, 부모를 즐겁게 하는 자리로,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진리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잘 나타납니다.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께서 쓰는 품꾼의 하나가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았으니, 잔치를 벌리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잔치를 벌리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아들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그러니까 하늘 아버지는 당신께로 돌아온 여러분을 품꾼으로 쓰지를 않고, 종으로 부리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들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사야 43:1-6절에서 예언하기를, ‘-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 너의 구원자다. -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부모의 마음입니다.

돌아오는 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표현을 합니다. 
1) 돌아오기 원하면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 3:11절에서 말하기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려면, 그동안의 잘못된 길과 잘못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야만 합니다. 바른 신자가 되자면 잘못된 생활에서, 혹은 비뚤어진 인간관계에서, 잘못된 생각에서 떠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2) 돌아오자면 잘못된 정신적 자세에서 떠나야만 합니다.
옛 사람의 가치관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돌아올 수 있고, 아버지 집에서 오랫동안 견딜 수가 있습니다. 옛 사람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다시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는 행복은, 아버지의 법안에 존재할 때만 누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돌아오자면 영적으로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지배와 교훈에서 벗어나서, 빛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고, 빛의 교훈을 받아야만 합니다. 영의 주인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효는 겸손히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4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세요. 겸손하게 부모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효도란 마음으로 부모님을 찾아야 하고, 몸으로 부모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 공경이고, 효도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란 여인이 하나님을 공경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슴으로 받고,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마음과 구체적인 삶의 자세 이것이 공경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세요.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하세요. 이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고, 구체적으로 감당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제부터 그런 삶을 살고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옛 삶의 모습을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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