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이 충만하여 (행 7:54-60)

첨부 1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행전 7:54-60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그리스도교와 교회 설립의 기초를 놓는 사건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본래 오순절로, 오순절은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성령이 처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무리에게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강림한 날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성령께서 특별한 사람들 즉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해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탄 마귀와 싸워 승리하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사탄의 억압에서부터 해방을 얻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령강림주일을 맞을 때마다, 새롭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기를 갈망하면서, 자기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매주일에 3일씩 금식기도를 했으며, 매해 1주일간씩 금식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세상 떠나는 날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경을 읽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매일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외우려고 힘썼고, 성경연구와 집필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독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 구약 30번, 창세기, 에스더, 이사야서는 540번, 신약 100번, 요한계시록은 10,000번, 요한서신은 500번을 통독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충만을 얻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성령의 뜻 아래서 살고자 노력을 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 임재해 계시도록 겸손히 기다리고, 모시고자 하는 경건한 영성생활이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내게는 그런 영성생활이 있는가? 한번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을 맞아서, 본문 사도행전 7:54-60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성령의 충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피차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은 그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 집사 스데반이 보여준 성령이 충만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성령 충만은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찬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예수의 영이 충만한 것을 의미하고, 예수의 영이 충만하다는 것은, 곧 예수의 생각이 나의 심령에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내 심령에 가득 차 있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생각, 다시 말해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소자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에 대한 거짓 없는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된 소자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전혀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정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보장하기 위해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본문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만납니다. 행 6:5절에서 누가는 스데반을 일컬어 표현하기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가 첫 번째로 세운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일어난 논쟁으로 인하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순교한, 순교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55절에서도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처럼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 그리고 하늘의 지혜가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이 예수님의 관심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관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소자라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오직 한 영혼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문둥병자와 중풍병자와 이방 여인과 군대 귀신이 들렸거나, 일곱 귀신이 들린 사람일지라도, 부정한 사람이라고 차별을 하지 않고,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고, 힘들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납을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도, 나사렛 사람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외치되, 목숨을 걸고 외쳤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되,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도 증거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예수님의 관심과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와 같은 생활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감당하는 사람인 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렘 20:9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백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날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날이 밝으면 거리를 다니기 시작하여,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말씀을 외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 가운데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짓 예언’이라고 하면서, 돌을 들어서 예레미야를 때리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조롱을 당하고, 돌아 온 예레미야는, 마음에 단단히 정하기를, ‘내가 이제는 두 번 다시 여호와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예언을 선포하는 일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곧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 예레미야에게는,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으면, 마음 가운데 불이 붙어서, 골수에 사무쳐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견딜 수가 없어서, 다음 날 다시 거리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돌에 맞으며, 조롱을 당하고, 죽을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서는,‘다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그러면 또 다시 마음 가운데 불이 붙고,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예루살렘 성의 거리로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성령이 충만한 때문이요, 주님의 관심사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먀와 스데반 같은 삶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연고로, 이루어진 생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생활은, 자기중심의 생각이 가득하여,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사로 심령이 가득하여, 예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사는 생활이라는 것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 3:34절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사람의 이야기나 자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말하고,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한번 겸손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진실로 주님의 관심사로 가득합니까? 성령의 법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합니까?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거짓 없이 사랑하고, 그들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고지 하는, 열정이 충만하십니까? 내 친족과 친구의 구원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한 영혼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께서 갖고 계신 뜻이 가득히 차고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스데반처럼, 예레미야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는, 언제나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쁘게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은 여러분의 영혼이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예수의 마음인,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또한 용서의 마음입니다. 어떤 죄인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을 보세요.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성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데도, 스데반은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살이 찢겨져 죽어가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 있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를 돌로 치고 있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입니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저 원수들의 영혼을 살려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주님께 드리고, 스데반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채우는 것인데, 주님의 마음은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거짓 없는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가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자를 자비한 마음으로 용납하는 마음이 충만한 마음을 말하는 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유념하세요. 제 아무리 많은 능력을 행한다고 해도, 자비함이 없고, 정결함이 없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의 열매가 아님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모세를 보세요. 히브리민족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하고 고생을 했건만, 이스라엘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를 향하여 시비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사실 모세에게는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였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께서 ‘저 패역한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새로운 거대한 나라를 주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지도자 모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때에 모세는 간구하기를, ‘하나님! 저 백성을 버리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주의 생명책에서 삭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이 기도는, ‘차라리 나를 지옥에 보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살려달라.’는 간구입니다. 이처럼 모세의 마음에는 비록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지극하고, 거짓 없는 사랑이, 가득 차있습니다. 지도자 모세의 마음처럼,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입만 열면 성경 말씀으로 줄을 잇는다고 해도,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을 동정할 줄 모르고, 약한 자의 입장을 고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거리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맡겨진 직분이 어떻든 간에, 용서와 사랑이 없는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고, 믿음 생활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도 사랑이거늘, 사랑이 메마른 심령을 보고, 어떻게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요,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 그래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스데반과 모세와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셋째로 성령이 충만하면 내 의지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의지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과연 그 일이 인간의 의지로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죽으면, 나의 아내와 자녀는 누가 돌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과연 순교가 인간의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순교,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 자기 부정의 생활은,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의지는, 성령께서 주관하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 아래 있을 때에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복음과 교회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삶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자기의 의지를 뛰어넘어, 주님의 의지에만 순종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의지와 마음과 생각을, 성령께서 주장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성령을 받아야만, 주님이 너희의 의지를 주장하게 되고, 그래야만 너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 어떠했습니까?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고도, 빈 무덤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도, 갈릴리로 내려가서, 다시 고기를 잡으러, 그물을 들고 바다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을 기하여,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제자들에게 임하면서, 제자들의 의지를 성령께서 주장하게 되고, 그러면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들로 변하였습니다.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던 제자들이, 기름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면, 나의 심령에 예수님의 뜻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때는,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살았지만, 성령이 충만해지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해 진다면, 여러분 역시 스데반 집사처럼, 순교를 당하면서도, 평안한 마음과 담대한 자세로 복음을 외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서,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약한 의지를 뛰어 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성령의 충만을 받고자 사모하고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롬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하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신자가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주여, 제 육신의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가 성령을 통해서 강한 능력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허망한 마지막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죄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떤 죄악의 도전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도전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주여! 내게 성령의 충만의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주일을 맞아서,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가 차고 넘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