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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의 축제로 (신 1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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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축제로 (신 16:9-12)

 
❚칠칠절을 지키라

여러분, 우리나라 달력에 절기가 몇 개나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나라에는 계절을 구분하는 절기가 입춘부터 시작해서 스물네 개나 있습니다. 이것을 24절기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칠월칠석이나 단오 같은 절기는 그 의미가 거의 퇴색하고 대보름도 별로 잘 안 지키지만 여전히 설날, 추석 이 두 절기는 민족의 가장 큰 절기, 명절로 지키고 민족 대이동을 하는 등 아주 잘 지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절기를 지켰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 중에는 7대 절기라는 것이 있는데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유월절 직전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무교절’, 첫 보리추수를 기념하는 ‘초실절’,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우리로 치면 설날에 해당되는 신년축제인 ‘나팔절’,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주는 ‘속죄일’,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이 일곱 가지를 이스라엘 7대 절기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서도 또 가장 중요한 세 개의 명절을 뽑아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부르는데 뭘까요? 바로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설날이나 추석처럼 이 세 절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절기들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오늘은 이 3대 절기 중에서 ‘칠칠절’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고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추수감사주일에 해당되는 날이 칠칠절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오늘날 교회에서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은 그 유래가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1534년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성공회를 국교로 강제로 믿도록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 오늘날 미국의 조상이 된 사람들이 바로 ‘the Pilgrim Fathers’라 불리는 청교도들입니다. 

그해 미지의 개척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절반 이상이 죽어갔지만 이듬해 가을,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해 첫 수확으로 거둔 옥수수, 콩, 호박, 보리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바로 이 축제가 추수감사절의 유래고, 이 절기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서 오늘날 11월에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11월에 지키는 미국식 추수감사절이 우리나라 절기와 잘 안 맞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11월이면 우리는 이미 추수가 다 끝나고도 한참 지난 때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교회는 추석을 즈음해 아예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기고 합니다만 그보다는 구약에 나오는 ‘칠칠절’이라는 절기를 추수감사주일의 본디 유래로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좋을 것 같습니다.

칠칠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의 수확을 축하하는 절기로서 5월 하순, 유월절 후 일곱 주가 지난 50일째 되는 날로 지킵니다. 그래서 일곱 주 뒤라는 뜻에서 ‘칠칠절’(七七節)이라고 불렀는데, 또 일곱 주, 즉 49일이 지난 50일째 지킨다고 해서 다섯 오(五), 열흘 순(旬) 자를 써서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한 보리를 첫 추수하는 날이라고 해서 보리 맥(麥) 자를 써서 ‘맥추(麥秋)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다가 신약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칠칠절,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지순례 왔다가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서 이때부터 오순절은 또한 성령강림절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보리추수를 기념하고 감사하여 지킨 이 칠칠절이 오늘날로 치면 추수감사주일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신명기 16:9~12을 보면 바로 이 칠칠절을 기념하여 지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에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의 가장 큰 정신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감사’지요. 바로 한 해 동안 지켜주시고 풍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헌금을 드리며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 오늘 추수감사주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감사가 도대체 뭡니까? 우리는 항상 감사, 감사 이 말을 참 많이 씁니다. 교회에서도 정말 많이 쓰지만 포항시청을 지나가다 보니 큰 현수막에 ‘감사운동’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항시장님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이 말을 쓴 게 아닐까 싶지만 아무튼 교회 밖에서도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대체 이렇게 많이 쓰는 감사라는 말이 어떤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감사(感謝)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정도로는 감사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칠칠절, 감사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면서 어떤 것이 감사인지 너무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가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기억이다

첫째,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기억’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기억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라고 했는데 어떤 것을 잘 지키려면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약속 시간을 잘 지켜라” 하면 무엇부터 잘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약속 시간이 언제인지 잘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다 보니 수없이 많은 시간약속을 하고 삽니다. 매일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도 대여섯 개 이상의 약속을 잡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 많은 약속을 기억할 수 없어 옛날에는 수첩에다 빽빽하게 기록하고 매일 수첩을 들여다보았습니다만 요즘은 수첩을 없애버리고 제 핸드폰, 스마트폰에다 다 기록을 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큰 일 날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실수로 핸드폰에 기록한 모든 일정을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난감한지요. 기억을 짜내고 짜내서 다시 기록을 했지만 상당수의 약속을 기억해 낼 수 없어 몹시 난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잘 지키려면 반드시 먼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 절기를 잘 지키려면 먼저 기억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 도와주신 모든 일을 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고 도와주셨건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삽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지금 여러분에게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 은혜를 각자 열 개씩 쓰라면 쉽겠습니까? 지금 당장 종이에다가 열 개를 쓰라면 첫째, 건강 주셔서 감사하고, 둘째, 뭘 해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두세 개는 쉽게 써내려갈지 몰라도 대부분 네다섯 번째부터는 슬슬 막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불과 감사 제목 열 개도 잘 못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열개도 못 되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열 개가 뭡니까? 크게 베풀어주신 은혜뿐 아니라 순간순간 베풀어주신 은혜와 도우심을 세려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 천 개도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겨우 열 개도 못 쓸까요? 기억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그게 은혜인줄도 모르고 기억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려거든 먼저 기억을 잘 하기 바랍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큰 은혜, 작은 은혜,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도 다 하나님이 도우심이요 은혜인 줄 알고 잊지 마세요. 기억을 잘 해야 감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는 성도 여러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 뿐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찬송가 301장)

이 가사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인 줄 알고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감사는 표현이다

둘째,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표현’입니다. 감사란 잘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베풀어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한테 도움을 참 많이 받았는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합니다. 하도 답답해서 도움 준 친구가 한 마디 합니다. “이 친구야, 내가 고맙다는 소리 들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네만 그래도 그 정도 도와줬으면 좀 고맙다 소리 한 마디라도 해야지?” 그러자 도움 받은 친구 왈, “에이, 꼭 고맙다 소리 해야 아나 뭐? 마음속으로 다 천번 만번 고맙게 생각하면 됐지!” 합니다. 아니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고맙다고 하세요. 말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부터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을 지나가시는데 그 동네 살던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을 좀 고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판정하는 것은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너희 몸이 이미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나았다고 판정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처럼 열 명의 나병환자는 제사장에게 가다가 자기 몸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열 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의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돌아온 한 사람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

어디 있긴요? 다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병 나은 것을 먼저 판정 받으려고 달려갔지요. 예수님이 몰라서 이렇게 물으셨겠습니까? 하도 답답해서 하신 말씀 아닐까요? 열 명을 다 병 낫게 해주었는데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천시 받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 뿐이고 나머지 아홉은 다 제 살 길 찾아 먼저 달려갔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물으신 게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9절에 보면 주님은 그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육신의 병만 나음 받은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영혼의 구원까지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 감사의 힘입니다. 그냥 감사한 마음만 가진 것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할 때 일어나는 능력입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이구, 예수님이라는 분, 정말 감사하다. 평생 나병 때문에 고통 받고 가족들 하고도 떨어져 살았는데 이렇게 단번에 고쳐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하고 생각은 했겠지요, 설마...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감사한 마음은 있는데 표현은 안 하니까 문제지요. 사마리아 사람 단 한 사람만 표현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의 구원까지 받는 갑절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반드시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이 없으면 감사의 능력은 반으로 줄고, 표현을 잘하면 배가 됩니다. 여러분도 감사를 꼭 표현해서 감사의 능력을 갑절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감사하다는 말도 좋고 기도나 찬양도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성으로 추수감사헌금을 드린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이렇게 네 힘을 헤아려, 즉 내 힘과 능력에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 여러분의 손길이 복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그 감사의 표현이 여러분에게 갑절의 복으로 돌아오게 될 줄 믿습니다.

❚감사는 나눔이다

마지막 셋째,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나눔’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읽습니다.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칠칠절에 감사 절기를 지키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나옵니다. 바로 너와 제 자녀뿐 아니라 집에 있는 천한 노비도, 또 네 성중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이 세 부류는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가 함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축제를 하고 잔치를 베풀 때 반드시 너와 네 가족만 먹고 즐기지 말고 집안에 있는 노예도 함께 즐기게 하고, 주의 종들도 즐기게 하고, 특히 주변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도 함께 즐기도록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우리끼리 먹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처럼 주변 사람들, 특히 약한 자, 작은 자들과의 나눔의 잔치, 그야말로 축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눔의 축제를 해야 할 이유가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고생한 것 기억하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의 분유와 헌 옷가지 원조를 받던 나라고, 필리핀이 서울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좀 베푸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들지만 작은 것을 나누고 더 어렵던 때를 기억하며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고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며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끼리만 감사하다고 잔치 하고 웃고 즐기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주변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와 기쁨을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아울러 올해 우리가 과연 얼마나 나눔의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오직 나 하나만, 내 가족만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쳤는가? 우리 교회는 과연 나눔의 삶을 실천했는가? 겸허하게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2012년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주의 크신 은혜였음을 감사드립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또 우리의 삶과 가정과 자녀들이, 내 경제적인 여건과 모든 삶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지내왔음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말씀을 맺으며 잠시 눈을 감고 열 손가락을 펴서 묵상기도 하며 올 한 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세어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세어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잠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 후에 제가 마무리기도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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