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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감사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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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감사 (막 14:3-9)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속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감출 방법이 없습니다. 

목사에게는 감출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감쪽같이 감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수도 없고 속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 중에도 우리 맘을 알고 계시고 예물을 드릴 때도 그 예물에 마음이 담긴 예물인지 아닌지를 아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한해의 추수에 대해 어떤 감사 예물을 드리셨나요? 
액수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 예물 속에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가 있냐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셨나요? 추수감사헌금이라고 드렸는데 그것이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추수에 진심으로 합당한 마음이 담긴 것인지요? 
아니면 불행하게도 억지로 또는 마지못하여 드리는 감사는 아닌지요?   

추수감사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긴 드리는데 정확한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는 것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왜 이왕 드리면서 하나님을 속이는 예물을 드리시나요? 

만약에 형식적으로 드리거나 대충 드리는 예물이라면 그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표정은 기쁘게 하기는커녕 근심어린 표정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 교회 재정이 어려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게 말씀으로 감동하시기를 말라기서로 응답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성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아예 떼먹는 도둑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한 여인이 예수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유대 문화로는 최고의 감사표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일부 제자들은 화를 냅니다. “왜 그 값진 향유를 낭비하느냐”고 책망하며 난리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6절을 보세요.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오히려 그녀를 감싸십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좋은 일을 하였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녀가 드린 감사는 어떤 감사이기에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문 말씀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1. 그녀의 감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감사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제 며칠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참히 달려 피를 흘리시고는 죽으시게 됩니다. 당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시점입니다. 1절 2절을 보세요.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상황이 막판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감사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이런 저런 상황 속에 향유를 드리는 것을 주저했다면 그에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공적 사역에 마지막 예물이 그녀가 드린 향유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 드리는 예물과 감사, 아무 때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를 놓치면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7절을 보세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것은 때를 놓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즉각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이것저것 계산하지 마시고 즉각 순종하세요. 그러면 그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헌신하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복을 받기 위해서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트린 것은 복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와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넘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여인이 예수님께 드린 것이 큽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준 복이 더 큽니까?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성령이 감동하시면 즉각,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기회를 잃지 않고 감사를 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녀의 감사는 값진 옥합을 깨트리는 감사였습니다. 

3절 하반부를 보세요.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매우 값진 향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을 깨트려 드린 감사였습니다.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 가치는 가롯 유다의 계산으로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정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나 300일 동안 일하여 번 품삯의 가치입니다. 그러니 매우 비싼 향유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보면 최소한 1500만원에서 3000만원어치 되는 값어치입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가롯 유다 입장에서 보면 이 여인의 행위는 미친 짓이고 열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옥합은 이 여인의 유일한 재산 목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향유를 한 번에 예수님을 위해 바친다는 것, 정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축컨대 이 향유는 그녀의 혼수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몽땅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 예물은 그 여인의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알아줍니다. 매우 값진 향유입니다. 그리고 그 옥합을 깨트려 부었습니다. 몽땅 드린 것입니다. 일부만 붓고 나머지는 남긴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 감사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주님께 드리는 예물이 쓰다 남은 찌꺼기로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남 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그런 것으로 드리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런 예물을 드렸습니다. 

레위기 22:22절을 보세요.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하셨습니다. 가치 없는 것은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라기1:8절도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거지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치 못하면서 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기는 값진 것으로 우리의 맘과 정성이 들어간 예물로 주님께 드려 우리의 감사가 열납되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3. 그녀의 감사는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의 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동내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옆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다니 나병환자였던 시몬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는 과거 주님께 치료를 받아 나병병자에서 정상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초대하여 대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마리아가 찾아 왔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여자가 누굽니까?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그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은 무덤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여자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신 메시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분께 무엇을 드린들 아까운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최고의 보물인 향유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식사도중에 그렇게 한 것은 우리 문화로 보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문화에서는 이것은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특별히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오라버니를 살리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이 헌신은 최고의 감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흥분하여 난리를 치는 가롯 유다를 제지하고 그 여자가 좋은 일을 했고 평가하십니다. 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따라 해 보세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입니다. 

그러려면 억지가 아니고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분보다 더 귀한 분으로 여기는 감사, 주님은 그런 감사를 받으시고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드렸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메시아요, 최고로 귀한분임을 믿고 드렸습니까? 그런 감사는 주님을 감동 시킬만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헌금의 액수, 예물의 크기,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런 믿음이 없다면 그 모든 감사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일억을 헌금했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왕이심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최고로 귀한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찬송가 가사를 아시죠?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왕께 드리는 영광을 받아 주소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은 우리 왕이라 왕이신 예수님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최고로 여기시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는 감사가 드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는 감사를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주변 사람에게는 시기 질투를 받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 감사해서 힘을 다해 감사를 드리면 주변 사람들이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시기 질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괜히 화를 버럭 냅니다. 

4절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그리고는 마치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척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여러분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대단히 경건한 척합니다. 일부 사람은 “잘났어~ 자기 혼자만 생각하냐? 형편이 어려워 못하는 남도 생각해야지” 합니다. 그러면서 헌신하는 것을 막습니다. 감사드리는 것을 막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공부가 있었는데 과정을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수료후 한 분이 시험이 들었답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몇 주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어렵게 말을 했답니다. 

그분은 성경공부를 가르쳐준 목사님이 너무 고마워 감사의 선물을 마련해 드리자고 수료생들에게 말했답니다. 그런데 공부를 같이 한 한분이 막았답니다. 

“남도 생각해야지 왜 혼자만 잘난 척하느냐?”라고 하며 막더랍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고 자기 혼자 도서상품권을 목사님께 선물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막았던 분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그 사람을 대놓고 비판하더랍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이 말도 안 걸고 해서 너무 무서워 교회를 못나온 것이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할 때 반드시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시기질투가 두려워 망설이지 마세요.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한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목사 잘 섬기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으로 뭔가를 하나님께 하시려거든 사람과 의논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마세요. 악한 세력은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하려는 것을 막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롯 유다를 보세요. 자기는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열 받아서 난리입니다. 결국 자기는 예수님을 은 30개 받고 팔아넘깁니다. 그리고는 자실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내가 주께 헌신하려면 반드시 시기 질투하는 인간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러기에 그냥 순종하고 그냥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쁨도 있고 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의식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하면 기회는 날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2)주님은 나름대로 의미해석을 하셔서 받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드리면 받으시는 주님은 드리는 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특별한 해석을 해서 받으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 여인의 헌신을 어떻게 받으셨나요? 8절을 보세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가 이 향유를 부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를 감동해 향유를 붓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향유의 용도를 장례를 위해 미리 부은 것이라고 해석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향유를 바를 시간이 없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향유를 바르려고 무덤에 갔을 때는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마리아의 향유가 주님의 장사를 위한 향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해서 드리는데, 주님은 그것에 의미를 담아 받으시고 주님 나름대로 해석하고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이 드린 그 헌금이 그저 감사해서 드린 것인데 그것으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그것으로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먹이십니다. 그것으로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복을 감사드린 자가 나누어 갖도록 하십니다. 할렐루야! 
나는 그저 감사해서 적은 것 드렸는데 주님은 그것으로 큰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3)주님은 우리의 감사에 놀라운 보상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린 이 헌신에 우리 주님이 감동을 받으실까요? 
오늘 본문에 주님은 마리아에게 엄청난 복을 약속하십니다. 9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대단한 복입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든지에서 이 여자가 행한 일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모범이 되는 것이고 조건을 따지지 않는 감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드리니 당신은 내게 뭘 주실 거요?”라는 헌신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그러니 다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시집 갈 혼수 밑천 다 드리고 시집 안가도 좋습니다”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감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우리의 감사는 누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것입니까요? 
(김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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