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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 맺는 가을이기 위하여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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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맺는 가을이기 위하여 (눅 13:6-9)


가을 바람이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을 넘어 겨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느 듯 금년 한해를 마무리 짖는 시점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을을 가리켜 열매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풍성한 열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농부의 삶의 보람은 열매를 거두는데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그 폭염과 무더위를 견디면서 땀을 흘리고 애써 일하는 농부의 유일한 보람, 유일한 기대는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열매를 구하기보다는 꽃을 구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순간적인 만족, 순간적인 쾌락, 결국에는 허무로 끝나 버리고 말 것들을 구하는 시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3무(無)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가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무책임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관심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감각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땅에는 자신의 삶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전혀 책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무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일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그런 의미 없는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삶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그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마른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에도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그 나름대로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순간을 쫓아서 방황하는 불나방처럼 제발 의미 없이 살지는 마십시오.  목적 없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나아가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책임이 있어야 하고, 관심이 있어야 하며,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만이 미래를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창조적인 내일을 열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꽃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열매를 사모하면서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이 가을에 거둘 수 있는 열매가 없다면 얼마나 황량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인생의 가을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에게 삶의 열매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삶을 살고서 인생의 가을을 맞았는데도 열매는 없이 그때에도 여전히 꽃을 찾아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지나면서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이 시점 앞에서 저와 여러분이 주 앞에 보여드려야 할 삶의 열매, 믿음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앞서서 다루어야 할 문제는 왜 내 인생에는 열매가 없는가?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첫째 이유는 자신의 존재적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책임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고 존재하는 책임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전시회 목적으로는 전혀 쓰여질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닙니다.  뗄감용으로도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왜 존재해야 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 인생이 존재하는 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신 이유, 그들과 3년 동안 삶을 같이 하시면서 그들을 품으시고 가르치신 이유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생의 목적을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가르칠 때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열매, 다시 말해서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가?  쉽게 말하면 전도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 마지막 명령 가운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제자를 삼아."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초점을 줄 수가 있었다면 어떻게 이 생명을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의 열매, 인생의 열매를 말할 때 내가 교회당에 드나든 회수가 얼마가 되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나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금년 한해 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나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 그가 누구입니까?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생명이라고, 예수를 구원이라고, 정말 예수가 소망이라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그 분이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저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어떻게 그 주님에 대해서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의 실상을 좀 솔직하게 직시했으면 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가 이 자리에 와 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발걸음을 돌려 우리 교회에 와서 이 빈 자리를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다른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는 앉아서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걸걸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사실은 이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얼마나 많이 나왔느냐?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하는 것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도 상급의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에 다니는 만큼, 성경공부를 한 만큼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전도를 통한 재생산에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워진 인생이 있느냐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찾고자 하시는 가장 중요한 열매는 바로 전도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열매는 바로 인격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성령의 한 열매는 하면서 아홉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 속에 아홉 가지의 특성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분, 화평과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던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 참을 줄 알았던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중고등부 헌신예배를 앞두고 아이들이 전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헌신예배를 드린다면 무엇인가 헌신해야 할 터인데, 전도를 하자.  전도를 해서 주일날 저녁에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진행되고 순서에 따라서 서기가 나와서 회원들을 호명합니다.  서기가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는 일어나서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나가다가 오늘 저녁에 처음 교회에 나온 학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주철"  이름이 불려진 이 아이는 자기의 이름이 불러지면 무엇인가 한 마디를 해야 하는 줄을 알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해를 결산해 가야 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내가 금년 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작년과 비교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마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금년 한해를 또 마무리해야 할 이 중요한 계절의 시간 앞에 서서 여러분과 제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를 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 졌습니까?  포도원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땅은 사막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 포도나무도 심고, 무화과나무도 심습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좋은 땅에 심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고 있었던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는 선민이라는 특권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가 택하신 족속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고 살아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은 분명히 특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제대로 된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면 이것은 어마 어마한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과연 이 특권에 합당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열매를 맺는 이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때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저 존재만 하고 있는 인생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보십시오.  무화과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  요즘 우리 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 줄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고 교회 생활을 할 때에도 제직이 되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IMF를 비롯해서 글로벌 경제 위기와 같은 경제 위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교회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큰 교회에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썩여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왔다가 조용히 사라집니다.  헌금에도 부담을 가지지 않아서 자유롭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구경꾼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는 인생들, 그래서 내 인생 속에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빈손으로 내 삶을 결산해야 하는 그 날이 올 것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 달란트를 남겼던 게으른 종이 책망을 받고 쫓겨나서 이를 갈며 슬프게 울었던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하는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까?
두 번째 원인은,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때로 저는 열매가 없다는 것에 관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민이나 하는지, 아니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땅만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화과나무가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이 땅을, 그리고 이 주변의 땅을 의도적으로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은 아니고 의식적이지도 않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별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인들이 항상 교회 안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교인들, 교회의 연륜은 굉장히 길었는데 내 삶 속에 뚜렷한 변화의 어떤 열매가 없습니다.

어쩌면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이런 변명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내가 교회에서 말썽을 부린 것도 없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전혀 책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는 저렇게 믿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때, 그것은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숫자는 현대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이 무서운 영향력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불려진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염병이었습니다.  전염병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확산되는 그 영향력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은 염병이다!"

또 하나의 별명 가운데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도 바울 일행이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이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They have turn the world"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던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마저 내가 빼앗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광물질의 자양분은 내가 다 빨아들이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가면 좋을 텐데,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이런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자기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의도적으로는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한 공동체에 20퍼센트의 사람만 건강하면 80퍼센트는 그 혜택을 나누어 가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20퍼센트만 헌신한다면 우리 교회는 굉장한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그리스도인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교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퍼센트는 벤치워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의자를 따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95퍼센트가 교회에 기여하는 것은 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따뜻하게 데웠다가 나가는 것이 유일한 기여라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서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준엄한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땅만 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존재 이유를 다 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그래서 찍어버리겠다.  어떻게 땅만 버리느냐?  여러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어떤 불신자를 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가 자칭 성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열매가 없다.  그러니 내가 찍어버리리라 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제까지 타성에 젖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그런 삶을 계속해야 합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의 결산을 알리는 사건이 내게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날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오늘 주님의 이 엄숙한 경고 앞에서 이 가을,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계절에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결산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이 열매 맺는 계절이기를 위하여, 저는 이 세 가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책임으로써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둘째는, 나의 상태로써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마지막 부분에 보면 포도원지기는 주인 앞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인하여 찍어버리겠다고 주인이 선언하니까 포도원지기가 8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합니다.  달리 번역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 한 번만 봐주세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물론 주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기쁘게 기회를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금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러나 이때쯤 한해가 저물어 가면 많은 분들이 이런 결심을 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잘 할께요.  1월 1일부터요."  그런데 1월 1일부터 잘하겠다고 하는 사람치고 1월 1월부터 잘하는 사람을 절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1월 1일부터….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삶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구체적인 열매를 향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겠는가?  아니라면 주님의 엄숙한 이 명령 앞에 서야 합니다.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 앞에 오늘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빙점이란 소설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고(故)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 여사의 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북해도의 가장 큰 도시인 삿뽀로의 '키따이찌죠오'(北一條) 교회의 교회학교에 나이가 많은 총각 유년부 부장 집사가 있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삿뽀로 철도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아사히가와라고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아사히가와는 북해도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주일이 되면 꼭 돌아와 본 교회에서 봉사하고 다시 아사히가와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삿뽀로와 아사히가와 사이에는 '시오카리'라고 하는 큰 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는 너무 높아 고개 밑에서 기관차 한 대를 더 붙이고 기관차 두 대가 끌어야만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다음날이 자기의 결혼식 날이기에 삿뽀로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올라 가다가 마지막 끝에 객차 두 번째 세 번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뒤로 다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관차 두 대는 그 사실도 모르고 나머지 객차들을 끌고 그냥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객 차 두 대는 계속 후진하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대해서는 이 총각 집사만이 조금 아는지라 달려가서 브레이크를 당겼으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후진하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높은 고개에서 벼랑에, 또는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어 140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 때 이 총각 집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주님께서 만약에 이 기차에 타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간단히 기도합니다.  이 기도 후에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돌을 주워다가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에 객차는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던져 기차를 막았습니다.  몸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연락이 되고 구조대가 달려왔습니다.

시신을 꺼냈더니 그의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교회학교 부장을 하며 독실히 믿는 이 사람은 죽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유서를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지녔던 유서입니다.  그 유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다.  내가 죽지 않을 자리에 가서 죽음을 자청하지 않겠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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