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이 보시는 헌금기준 (룻 3:1-5, 4:13-17, 막 12:38-44)

첨부 1


예수님이 보시는 헌금기준 (룻 3:1-5, 4:13-17, 막 12:38-44)


한 가족이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교회에서 드린 예배의 소감을 한 마디씩 했습니다. 먼저 아빠가 목사님의 설교가 시원찮았다고 불평했습니다. 내용도 없는데다가 길고 지루했다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엄마 역시 찬양대의 노래가 형편없는데다가 예배 때 부른 찬송가가 한결같이 부르기 어려운 곡만 골랐다고 불평했습니다. 아빠 엄마가 푸념하는 말을 듣고 아들이 끼어들었습니다. “오늘 예배는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생각해보세요! 두 분이 천원만 헌금하고서는 너무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닌가요?” 

어떤 비행기가 갑자기 추락하게 되자 승무원들이 목사님이 탑승한 것을 알고서는 뭔가 종교적인 조치를 취해달라고 다급하게 부탁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헌금 바구니를 꺼내어 헌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받기 전에 지갑부터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회개는 호주머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돈 문제, 특히 헌금문제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주제입니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시험에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공개적인 언급을 주저합니다. 그저 개인의 프라이버시 정도로 제쳐두려고 할 때가 많지요.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유달리 돈에 관한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믿음”과 “기도”에 관한 주제는 각각 오백 개 정도 밖에 안 되지만 “돈”에 관한 주제는 무려 이천 개나 된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막 12: 41-44절에서도 예수님은 다름 아닌 헌금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헌금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헌금하는가를 지켜보신 예수님>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근처의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여기 41절을 보면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헌금함에 얼마를 넣는가를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즉 어떤 자세로 헌금하는가를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헌금액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헌금자세를 관찰하셨던 것이지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니면 겸손하게 정성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서? 아니면 너무 기쁜 나머지 기꺼운 마음으로? 예수님은 헌금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읽으면서 그들의 헌금하는 마음과 자세를 눈여겨보셨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특히 두 가지 정 반대되는 사람들이 눈에 잡혔습니다. 41절 후반부와 42절을 보세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여기 “부자‘라는 말과 ”가난한 과부“라는 말이 대조됩니다. 게다가 부자는 ”여럿“인데 반하여 가난한 과부는 ”혼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돈이 꽤 많은 유복한 사람들은 그 때에도 많았겠지요. 그래서 상당량의 헌금을 보란 듯이 내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 헌금함은 쇠붙이로 마치 나팔처럼 만들어서 헌금이 들어갈 때 쨍그랑 하고 소리를 냅니다. 부자들은 헌금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나한 과부는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아마 옷 입은 행색이 초라했기 때문에 금방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만, 예수님 시대의 과부는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누구나 어려웠습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과부는 생계가 막막한 극빈층 그 자체였습니다.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남편의 가족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는데 아주 낮은 임금과 비천한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시대의 과부는 누구에게나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만큼 어려운 계층이었습니다.

부자들은 헌금을 많이 했다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액수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라고 밝힙니다. 렙돈은 구리 동전으로서 그 당시 유통되던 화폐 중에서 가장 낮은 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0원짜리 동전 정도로 보면 좋겠지요. 더 정확히 말해서 헬라 동전 두 렙돈은 로마 동전으로는 한 고드란트라고 했는데, 마 10장 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를 사는데 8렙돈이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화폐단위를 우리나라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일이 쉽지 않다면, 아주 편하게 말해서 가난한 과부는 우리 돈으로 한 2천 원 정도를 헌금함에 넣었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세 가지 헌금기준>

이제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두 부류의 정반대되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내리시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43-4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뜻밖에도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아마도 부자들이 넣은 헌금에 비하면 몇 백분의 일, 몇 천분의 일 밖에 되지 않겠지만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헌금의 기준은 얼마나 많이 내는가 하는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내는가 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예수께서 보시는 헌금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자세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참된 마음으로 하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장면 바로 앞에는 예수께서 서기관들의 위선과 탐욕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다니기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38-39절). 한 마디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자들이지요. 서기관들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의 체면과 영예에 있었습니다.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언제나 자신의 이기심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는 참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상태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참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대기업에서 은퇴한 부부가 시골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마을에 있는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는데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나 교인들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두 부부는 가장 멋진 옷을 차려입고 한 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시절을 슬쩍 흘리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의 태도가 확 달라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소유 때문에 우리에게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외적 소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으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부는 가난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드린 헌금의 액수가 아닌 과부의 중심을 보셨기에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가난한 가운데 가진 모든 것을 헌금했다고 칭찬하십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 두 차이를 아십니까? 한쪽에서는 액수는 엄청나게 작지만 전 재산을 털어 넣었고, 다른 쪽에서는 액수는 엄청나게 크지만 헌금을 해도 자기 재산에는 전혀 축이 나지 않는 “LEFT-OVER,” “SURPLUS,” 나머지 잉여를 드렸습니다. 

CNN의 설립자로서 세계적인 거부인 테드 터너(Ted Turner)가 10억만 달러를 유엔에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부액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돈은 기부하던 해에 9개월 동안 투자를 해서 얻은 순이익금으로서 “잉여”였습니다. 이 돈을 다 기부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희생이나 지출도 없는 그저 남은 돈을 사회에다 환원한 것이지요. 여기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 역시 풍족한 가운데 헌금을 했기에 많은 돈을 헌금했다고 하더라도 살림살이가 축이 난다든지 하는 불편이나 희생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달랐습니다.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왜 이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것입니다!

마이클 맥컬로우(Michael McCullough)는 “감사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Gratitude)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날마다 2분 혹은 3분씩 짬을 내서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그 날 하루는 행복한 가운데 마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부정적인 감정은 물러가고 긍정적인 기분이 몰려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이 밤에 잠도 더 잘 잡니다.” 

옳습니다. 진정한 헌금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우리의 감사지수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후하게 내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에는 그녀의 눈물과 땀과 피가 묻어 있습니다. 물론 액수로 치자면 부자들의 헌금에 훨씬 못 미칩니다. 하지만 두 렙돈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에 44절에서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어떻게 보면 이 과부에게 두 렙돈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그 전부를 희생했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한 렙돈은 헌금함에 넣고 다른 한 렙돈은 자기를 위해서 챙겨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이 여인은 장차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고후 8: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 하시려고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칠 때 기꺼운 마음으로 후하게 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후 9: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옳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전기세를 내거나 세금을 내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인가를 헌금을 통해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내게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헌금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미국 워싱톤 디시에 있는 구세주교회에 다니는 한 가난한 과부 교인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잃고 여섯 아이를 간신히 먹여 살려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가정입니다. 하지만 매주일 예배 때마다 4달러씩 어김없이 헌금했습니다.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을 안 교인들이 담임목사님이 이 가정을 방문해서 4달러를 헌금 안 해도 되니 가정을 위해서 쓰라고 권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그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의 대답이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위엄과 의미를 안겨주는 마지막 것을 빼앗으시려 하는군요.”(You are trying to take away the last thing that gives me dignity and meaning.) 

그렇습니다. 헌금은 무엇보다 나에게 유익을 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하고 책임 있는 신앙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헌금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행 20: 35). 

<“Ground Hitch!” 말고삐를 땅에 늘어뜨려도!> 

말을 땅에다가 그냥 매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개 말에서 내릴 때 말고삐를 울타리나 기둥 혹은 나무에다가 매어두지요.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이런 물체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할 수 없이 말고삐를 그냥 땅에 늘어뜨린 채 놔 눕니다. 바로 이 때 훈련을 잘 받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훌륭한 말은 어느 곳에도 고삐를 매지 않고 그냥 땅바닥에 축 늘어뜨려 놓는다고 할지라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튀거나 딴청을 부리지 않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그 장소에서 잘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고삐를 그냥 땅바닥에 늘어뜨려 놓으십니다. 이제 선택과 결단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번 돈이니 내 마음대로 하자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어차피 주님께 매인 몸 내 모든 재산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강제로 헌금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우리에게는 철저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훈련이 잘 된 교인들은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릴 줄 압니다! 

그렇다면 헌금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어디쯤에 위치해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녀의 이런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를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소중한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헌금생활을 통해 그 믿음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액수가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자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