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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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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3)


시편23: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년은 짧은 것 같고, 매주 반복되는 일상을 산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보면 그것이 1년을 이루고 그것이 나의 인생이 됩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주님께 감사할 것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3절의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이 다윗의 주요한 감사제목이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소생시켰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게 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것은 ‘내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곧 ‘나를 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1. 기가 막힐 웅덩이

목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양의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양은 늑대나 사나운 짐승의 먹잇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고, 위험에 빠졌으면 거기서 구원해 내는 것이 목자의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동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삼상17:34-35)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능력 있는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 입에서 다윗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자나 곰처럼 사나운 사울 왕의 입에서, 블레셋 군대의 입에서, 사람들의 음모의 입에서 다윗을 구원해 내셨던 것입니다.

양은 사나운 짐승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목한 구덩이나 바위틈이 그러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은 드러누우면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허공에 네 발만 버둥거릴 뿐 뒤집지를 못합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순간입니다. 양과 같은 초식동물은 위에서 활발한 발효작용을 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가스가 차서 죽기도 합니다. 목자는 그래서 양들의 동태를 예민하게 살펴야 합니다. 위험하면 바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이처럼 구덩이에 빠졌던 위기의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시편 40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2) 기가 막힐 웅덩이란 어떤 웅덩이를 말합니까?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무시무시한 웅덩이’(킹제임스), ‘절망의 웅덩이’(RSV), ‘끈적끈적한 웅덩이’(NIV)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웅덩이를 말합니다. 보통 중동 지방의 물웅덩이는 옹기 형태처럼 안이 깊고 입구 쪽이 좁도록 팝니다. 

우기 때 물을 받아두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웅덩이에 빠지면 밖으로 나오기도 어렵고, 그 바닥은 진흙 뻘투성이입니다. 아마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빠뜨렸던 웅덩이가 바로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였을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형제들을 향하여 ‘애걸하고 괴로움을 호소하였지만’(창42:21) 형제들은 몰인정하였고 오히려 죽이려하였습니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은 그 웅덩이에서 요셉을 끌어내셨습니다. 그 웅덩이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웅덩이가 애굽으로 향하는 그래서 총리 대신의 자리에 이르는 터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렘38:6) 하나님은 깊은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를 건지시고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동일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귀신들린 자가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 귀신을 이용해서 점을 치던 사람이 자기 이익의 수단이 끊어지자 바울 일행을 모함하였습니다. 빌립보 관원들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등에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중죄인도 아닌데 발에는 착고를 채웠습니다. 

잘못도 없이 끌려 왔기에 화도 날 법도 하고, 절망도 할 법도 한데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간수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 일행은 풀려났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바울이 깨달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사방은 막혔어도 하늘을 열렸습니다. 찬송할 때 감옥 문이 열립니다.

2. 영적 침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말씀은 우리 목숨을 살려주신다는 뜻도 있지만 영적 침체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우리의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시편 42편 시인의 탄식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이 시편 시인은 얼마나 불안했던지 42편 5절, 11절, 43편 5절 세 번에 걸쳐 자신의 불안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영적 침체를 겪습니다. 먼저는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죄를 짓고는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거나 실수를 했다는 자격지심이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영적으로 침체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또 실패를 경험했을 때 우리는 영적 침체를 겪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의도대로 풀려가지 않을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집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껴져 낙담하거나 절망합니다. 심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기력증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성공하거나 승리했을 때도 영적 침체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에 오른 이후의 허탈감이나 목표상실이 주요 원인입니다. 

신앙의 위인들 또한 이런 영적침체를 경험하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평생 동안 우울증을 안고 살아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우울증은 매우 심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인 멜랑히톤에게 썼던 편지에서는 “우울증과 육체적 고통으로 일주일이 넘게 죽음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절망감의 돌풍과 파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렸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 또한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중 한두 달을 어둡고 침침한 런던을 떠나 프랑스 남쪽의 리비에라는 따뜻한 해안도시에서 요양을 하곤 했습니다. 스펄전이 그의 성도에 보낸 한 편지에서는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잠자지 못하며, 낮에도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이런 고통 가운데서 자기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연약함을 알았기에 동일하게 연약함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설교 가운데에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의 기쁨이 생생이 묻어났던 것입니다.

양이 위기는 양 자신의 무능력도 양의 부주의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실패는 목자를 놓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실수해도 목자가 그 곁에 있으면 양은 안전합니다. 우리가 영적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공해도 놓치기 쉽고 실패해도 놓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즈는 “모든 영적 침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기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존 파이퍼라고 최근 한국 성도들이 좋아하는 신앙적인 글들을 많이 쓰고 있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교회를 운영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표어를 아예 “하나님을 바라라, Hope in God”으로 벽에 28년 동안이나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그 답을 알기에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그 갈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발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물줄기를 찼듯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은 이처럼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니다. 산상수훈에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저가 배부를 것이기 때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마른 자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했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여기 개역판 성경의 ‘유쾌하다’는 번역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유쾌하다는 뜻은 영어로는 refresh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유쾌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영적 어두움이 사라지고 우리 안에 열정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enthusiastic입니다. 그 의미는 그 안에 신을 모시고 있다(en + theos)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살아날 때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42편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가만히 있는데 내 영혼에서 낙망과 불안이 올라옵니다. 내 깊은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내 자아의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듣고 더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와 대화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1분당 영어 단어로 150에서 200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신과 마음속으로 대화할 때는 1분당 1,300 개 단어의 속도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도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내 자아의 소리가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짜증 섞인 내 자아의 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 자아에게는 긍정적인 말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아에게 말하십시오. 내 자신에게 복음의 설교를 하십시오. “할 수 없어”, “어떻게 해”, “절망이야”, “끝났어.”하는 어두움의 소리 대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내 자아야, 들어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시면 누가 너를 대적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너를 위해 내어주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아들과 함께 네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고소할 것인가?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참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누가 너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8:31-35)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고 나면 이상하게 우리에게 새 힘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시19:7-8)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 침체기에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쓰고 암송하십시오. 그 하나님 말씀을 내 자아에게 들려주십시오.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3. 의의 길로

양들은 매우 고집스럽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들이 갔던 길로만 가고, 먹었던 장소에서만 그 뿌리가 다 드러나도록 먹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철은 건기라서 풀들이 죽거나 누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산등성이를 보니 마치 줄을 그어놓은 듯 어지러운 선들이 산들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양들이 지나간 곳이라고 합니다. 양들은 앞에 간 양의 뒤를 따라서 고집스럽게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오래 되면 골이 파일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그래서 양들이 푸르고 싱싱한 꼴을 먹을 수 있도록 자주 자리를 옮깁니다. 그래야 초장도 보호되고 양도 좋은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단 이것뿐만 아니라 양들은 자기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절망과 배고픔으로 이끄는 길인지 모르고 무작정 갑니다. 목자는 이런 양들을 제어하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양들에게 의의 길은 곧 양들이 ‘잘 살고 행복한 길’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 분명한데 의의 길이 바로 내 영혼을 행복하게 하고 결국은 잘되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시편 1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의의 길이 살 길이고, 죄의 길, 곧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가는 것은 죽을 길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가치관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를 시편 23편은 자기 이름, 곧 하나님 이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부정직하며 불법을 행하며 사는 것을 못 견디십니다. 자기 이름과 명예가 달린 백성이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전멸시키고 모세를 통해서 새 백성을 일으키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설득했던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기도였습니다. 세상 민족들이 하나님이 무능력하여 이스라엘을 버렸다 말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끝내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신 이유도 자기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고 오랜 후에 그들을 다시 포로로부터 해방시키시려 했던 중요한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36:22-23)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된 상태로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상태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동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간구해야 할 바도 모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잘 분간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 명예를 위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못 견디십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룩한 존재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보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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