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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지금 말고 다음 기회에 (행 24: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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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고 다음 기회에 (사도행전 24:24-27)

지금 말고 조금 있다가, 오늘 말고 내일, 아니면 몇 일 후에 …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 할 일을 미루고 연기했던 적이 있지요?그래서 결국 기회를 놓치고 후회했던 경험들이 모두 있을 겁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이 다음에 해야지 하고 미루는 것은 게으른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마음의 부담이나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성격상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일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일처리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 아내는 거의 언제나 빨리 지금 바로 해결하자는 식이고 저는 보통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편입니다.그래서 가끔 저의 느린 반응 때문에 답답해 합니다.눈에 보일 때 당장, 생각 났을 때 빨리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기는 합니다.그런데 때로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아내는 물건을 사고 받은 영수증이나 당장 필요없는 허드렛 것은 금방 버리고 치우는 편인데 저는 다음에 필요할지 모른다 생각되는 것은 일단 이 구석 저 구석에 쌓아두는 편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집니다.전에 보관했던 것을 찾는데 보이질 않아 아내에게 물으면 벌써 재활용 통에 버렸다는 말을 여러 번 듣습니다.어수선하지 않고  깨끗해서 좋기는 한데 필요했던 것이 없어져 다시 구해야 한다 생각하면 그 순간 열이 나고 ‘또 벌써 버렸어?’ 합니다.그런데 모아 두고 묵혀 둔 물건이나 서류 등은 대부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결국 재활용 통으로 들어간 경우가 더 많아 아내의 신속한 처리 방식과 깔끔함 덕을 더 많이 봅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은 천천히 틈나는 대로 처리해도 큰 손해를 보거나 일을 망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을 할 시점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기회를 봐서 이 다음에 하겠다고 미루는 습관이 반복되면 크게 후회할 일도 생깁니다.학교와 전공과목을 선택하고 직장과 거주지를 정하며 평생 한 배를 타고 인생 항로를 항해할 배우자를 정할 때가 왔는데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이 다음에 틈이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 한다면 기회가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평생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지금 당장 버려야 할 나쁜 습관, 버릇들을 끌어 안고 이 다음에 틈나면 다시 고려해보겠다 하면 나중에 정말 큰 일을 당합니다.

신앙의 문제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그 마음을 변함 없이 유지하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지만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유혹과 시험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성경을 읽고 개인 묵상을 할 때나 주일예배 혹은 인터넷 방송 설교를 들을 때 나의 죄와 허물이 드러나고 내 마음이 찔릴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듣고 깨달은 것으로 그치고 귀를 깨끗하게 청소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삶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양심의 찔림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깨달았다면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올바른 방향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나를 살게 하는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말씀을 듣고 찔림은 받았지만 삶의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며 예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양심과 행동이 드러난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외친 베드로의 설교를 들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고 회개하며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선생들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며 발 앞에 엎드렸고 바울을 집으로 데려가 말씀을 듣고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고넬료가 시몬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도리를 들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 온 집안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이름으로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고 매를 때리던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그립바의 손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고,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갈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쳐 죽이기도 했습니다.바로 그 자리에 있던 청년 사울은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그런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이 변화된 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세 차례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가이사랴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바울이 당할 고난을 예견하고 절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만류했습니다.그러나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한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도들과 교회의 장로들에게 문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들린 바울은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 분노로 가득 찬 유대인들 손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로마 군사들과 천부장의 개입으로 몸숨을 건졌습니다.천부장이 폭동의 진상을 밝히려고 다음날 유대인의 공회를 소집하여 유대인 대표와 바울의 진술을 들었지만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고 총독 벨릭스에게 이 사건을 처리해달라고 청하며 사건 경위서와 함께 바울을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였습니다.

총독 벨릭스가 주관하는 법정에 선 유대인의 대표는 바울을 가리켜 ‘저 사람은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 세상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을 선동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욕하며 저 사람이 우리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를 범했기에 우리 손으로 처리하려다 당신의 천부장이 개입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총독께서 직접 심문하시면 그 죄상을 알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을 때  바울은 그들이 고소한 것처럼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사람들을 선동한 적도 없음을 진술한 후 그러나 고백할 것이 있다면 그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도를 따라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믿으며,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고 이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제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힘쓰고 있으니 나는 다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사실 대로 진술했습니다.

총독이 고소인들과 바울의 진술 내용을 들어보니 소송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나 악행에 대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들의 종교와 예수라는 사람의 부활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말은 이전에도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소송이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일이 아니라 판단한 벨릭스는 이 다음에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그때 처결하겠다 하고 판결을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친구들 중에 누구라도 면회할 수 있게 하고 수종드는 것을 막지 말라 하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고소인 측 대표로 나온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장로들의 분노가 워낙 거세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바울을 구금해두었지만 속으로는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던 벨릭스의 배려였습니다.죄수가 아닌 죄수로 갇힌 바울은 느슨한 구금 상태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고 이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하고 편지도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바울이 벨릭스 총독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 앞에 서게 된 것도 이런 상황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로마인 총독 벨릭스와 결혼한 드루실라는 바울이 믿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고 남편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이런 관심과 호기심 때문에 벨릭스 총독 부부는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고 그가 전하는 기독교의 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여러 차례 불러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배우자들을 두 번씩 버리고 불륜관계로 결혼한 사이였습니다.드루실라의 미모에 매혹된 벨릭스는 유대인 마술사를 동원하여 자신과 결혼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드루실라를 세번째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탐욕과 허영의 모형이었습니다.벨릭스 총독 부부의 부정한 결혼생활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벨릭스라는 인물은 워낙 돈을 좋아하는 탐관오리였다고 합니다.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총독 벨릭스가 퇴임하고 브루기오 베스도가 부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왜 갑자기 벨릭스가 팔레스틴을 떠나게 되었을까요?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인종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벨릭스가 헬라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의 편을 들어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그 일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탄원하였고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엄한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형의 중재로 가까스로 중벌을 면했다고 합니다.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 벨릭스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불러낸 그 자리는 총독 부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좋은 말을 골라 기분을 맞춰줄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바울에게 호의를 베푸는 벨릭스 부부에게 잘 보이면 무죄를 인정받아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탐욕과 허영으로 가득한 두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의와 절제와 장차 다가올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바울의 책망과 경고에 벨릭스 부부는 허를 찔렸고 심히 당황스럽고 불쾌했을 것입니다.양심을 찌르는 말씀이 두려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고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그들이 꼭 들어야 할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오늘은 이것으로 족하니 돌아가라 다음에 틈이 나면 다시 너를 부르겠다’ 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회개와 심판,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종교적인 지식이나 일종의 철학 사상으로 여겼고 마음 속의 탐욕은 그대로 가진 사람이었습니다.양심을 찌르는 불편하고 곤란한 자리는 일단 피하고 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듣겠다는 식으로 회개의 기회를 놓친 벨릭스는 진리의 말씀보다 뇌물에 더 마음을 두고 그 후로도 바울을 계속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던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혼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혔고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목이 잘려 순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헤롯 역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따르는 민중들이 두려워 죽이지 못했었는데 헤로디아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가 결국 요한의 목을 자르고 말았습니다.부정을 범한 헤롯과 벨릭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찔림을 받았지만 다음 행동이 따라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회개의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린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닐까요?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배우자들의 부도덕한 행동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욕으로 그 속은 이미 깨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가정들이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지적 받아 양심의 가책이 되며 심판이 두렵지만 실제로 회개하는 자리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인생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동안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할 일이 생각나거든 미루지 말고 지금 하라”는 작자 미상의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지금 하십시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끼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가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과거에 실패했던 사람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나이가 들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두려워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감동적인 글입니다.사람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결코 늦었다고 생각말고 제2의 인생을 지금 시작하라 격려합니다.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바로 지금 시작하라는 이 싯귀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다가옵니까?그렇다면 여러분의 남은 인생 그리고 영원한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지나간  어제가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다가올 내일 역시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어 꼭 사고 싶었던 옷, 가방이나 어떤 것들은 세일 기간이 지나면 다시는 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없고 어쩌면 똑같은 것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그래서 기회를 놓친 후  두고두고 서운할 수 있습니다.꼭 가고 싶었던 여행 기회를 놓치고 내 인생에 언제 다시 그런 기회를 또 만날까 아쉬워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지거나 아주 절단나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아쉬울 뿐입니다.

그런데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복음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를 만났을 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이 다음에 틈이 나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고 미룬다면 잠깐 후회하고 말 일이 아니라 영원히 후회할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이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주의 말씀 앞에 양심이 찔리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지체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며 행함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그때가 바로 나를 만나고 싶어 주님이 부르시는 시간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미쁘고 의로우신 주님’의 부르심에 두 손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6)하신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2012년이 한 달 조금 더 남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년으로 미루지 말고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바로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위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우리가 옥스포드한인교회에서 주의 이름으로 만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습니까?여러분을 옥스포드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학위나 더 나은 직장과 스팩을 쌓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주께로부터 받은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를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어디를 가든지 주의 말씀에 붙들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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