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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는 자가 받을 복 (시 75:1-3, 롬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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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자가 받을 복 (시 75:1-3, 롬 14:5-6)

자가용 자동차가 귀할 때 미국의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부흥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는 뚱뚱한 흑인 여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자기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뚱뚱한 여자와 아이들로 말미암아 자기는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순간 불평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회개하는 마음으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옆의 이 뚱뚱한 흑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감사는 바리새인의 감사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위선적인 감사가 많습니다. 자신의 욕심의 감사가 많습니다. 
  
순수한 감사는 하나님 중심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감사입니다. 시편의 기자처럼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려고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주신 것에 대한 보답하려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받은 선물을 보지 말고 선물을 주는 손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왜 좌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까? 가나안은 보지 못하고 광야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보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미래를 보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를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실 때에 “잔을 가지시고 감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떡을 가지시고 감사하셨다는 말은 없을까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감사는 수학의 더하기와 같아서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감사하면 플러스로 복을 받게 된다.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수학의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입으로 감사하면 마음의 감사가 생깁니다.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기 피곤하지만 “하나님 감사합니다”(Thank God)를 입으로 하다보면 마음에 감사가 넘칩니다. 힘들지만 감사가 우러납니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입니다. 
  
시편기자는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이라고 합니다. ‘감사하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호디누’인데 이 단어의 기본형은 ‘야다’로서 경배하다, 고백하다의 뜻입니다. 감사를 공적으로 시인하고 찬양합니다. 자신의 감사의 감격을 이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우리에게도 여느 때보다 감사가 두 배, 세 배 많아져 감사가 풍성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의 이름이 가까움으로 감사합니다. 
  
시편 75:1에는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이나 성품 혹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이 가까웠다는 표현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던 앗수르의 산헤립과 그 군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식간에 전멸된 것을 말합니다. 악한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란 종말론적인 영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우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악한 자가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구원을 얻고 승리하니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니 우리의 원수가 멸망하고, 우리는 승리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능력과 하시는 일이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공개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이름도 모르는 멀리 계시는 신이었습니다. 이름을 알고 나서 모세와 가까이 계신 하나님, 모세와 함께 가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하나님은 하늘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우리 곁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말 중의 하나가 아빠란 말입니다. 아빠는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가장 힘 있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특권입니다. 복이 있는 일입니다. 이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이름의 주인이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의 주인인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 오셔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어찌 복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찬송가 가사에 보세요. “주의 곁에 있을 때 맘이 든든하오니 주여 나를 생전에 인도하여 주소서”. 주님이 가까이 계시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염려와 걱정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란 주님이 가까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우리의 원수는 파멸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활력이 넘치고, 감사가 충만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고전 16:22)가 인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살았던 성도들입니다. 요한도 그의 계시록 마지막에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말로 맺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기대 때문에 그들은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초대교회는 강렬한 기대감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성찬 상 앞에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인식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찬 안에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성찬은 무려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식을 유지하며 예배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큰 환란과 함께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며 무서움입니다. 아이를 밴 자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날의 고통 때문에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인류역사에 가장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이날이야말로 가장 기쁜 날입니다. 희망의 날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주님이 오신다면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나는 이런 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죽음은 누구나 두려운 일인데 죽지 않고 주님을 본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들이 나옵니다. 흔히 ‘10고조’라고 합니다. 에녹은 10고조 가운데 가장 짧게 이 세상에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고, 노아도 950세를 살았는데 에녹은 365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에녹이 제일 많이 살았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지 않고 승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비참한 죽음을 보지 않고 죽었으니까요. 
  
요한계시록 1:3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우므로 기록한 예언의 말씀 잘 읽고, 귀담아 듣고, 말씀대로 잘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가까움을 알고 감사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의 기이한 일을 전파하므로 감사합니다. 

시편 75:1에는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주의 기이한 일들”이란 앗수르의 대군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몰살하는 것을 확인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이 전달됨을 아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감사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전파하므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감사할 조건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출애굽의 여정에서 막연하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내용이 그들이 눈으로 본 것들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의 기이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 가운데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날인 것이 기이합니다. 또 하루를 산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여전히 숨을 쉰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해가 뜬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태양 하나가 온천지를 밝히는 것이 기이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고, 계절의 변화가 오고, 곡식이 익어 가을걷이를 하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온통 기이한 것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고 합니다.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 나타냅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의 대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일 아침 스스로 세 가지를 질문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내가 즐거워하는 일은 무엇인가? 둘째, 내가 무엇에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셋째, 내가 감사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런 물음이 마음에서 우러난다면 매일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내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과제입니다.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를 찾는 자에게 감사는 보화입니다. 감사를 못 찾는 자에게는 감사는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주변에는 기이한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연, 우리의 몸, 발생하는 현상들, 아이들이 자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보호,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기이한 일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의 눈에 발견되는 감사가 늘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사고로 다쳤을 때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를 많이 쓰고, 통증이 적으면 진통제를 적게 쓰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1975년 미국의 과학자들이 전쟁 시에는 그 반대로 적게 다친 사람에게 진통제를 많이 쓰고, 많이 다친 사람에게 진통제를 적게 쓰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전쟁터에서 포탄을 맞아 중상을 입어 실신한 군인이 의식이 돌아 왔을 때 자신이 야전병원에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기쁨과 곧 후방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군인은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뇌에서 특수한 물질이 분비되는데 이것을 ‘엔돌핀’이라고 합니다. ‘엔돌핀’이 뇌에서 나올 때는 육체적 통증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도 없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 분비물입니다. 감사는 마음도 육체도 다 치유하는 약입니다. 
  
종교개혁이 한참일 때 영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왕비인 캐더린을 폐위하고 앤을 왕비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로마 교황의 반대에 봉착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종교개혁보다 영국은 이런 왕권과 교황권의 충돌로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입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수장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고 믿는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에 반대하게 되고 이 일로 핍박을 받아 청교도가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1620년 102명의 반 영국 국교파 청교도들이 탄 메이플라워호가 12월 11일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원주민 인디언들과의 마찰, 가혹한 자연 환경 등을 극복하고 노동을 하며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이상을 실현했습니다.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첫 수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 비롯된 국민적 축제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첫 추수감사절에 그들은 일곱 가지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째는 180톤의 작은 배가 시속 2마일로 117일이 걸려 대서양을 건넌 것을 감사했습니다. 
둘째는 항해 중에 2명이 죽었지만 1명이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셋째는 폭풍에 돛이 부러졌지만 파선하지 않고 무사히 항해함을 감사했습니다. 
넷째는 큰 파도에 여자들이 물에 빠진 적이 있지만 무사히 구출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다섯째는 신대륙에 도착한지 한 달 만에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섯째는 117일 동안의 항해 도중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일곱째는 지난 1년 동안 농사하여 추수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이한 하나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가 풍성한 절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감사라면 우리도 헤아려보면 무지기수일 것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지키는  우리의 감사는 몇 가지나 됩니까? 신대륙에 와서 처음 추수감사절을 지키던 청교도들의 일곱 가지 감사 보다 우리가 더 많아야지요?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큰 풍랑을 만납니다. 풍랑을 만난 것이 누구 탓이냐고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걸렸습니다. 사공들은 그를 바다에 던졌는데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큰 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요나 2:9에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이런 큰 고기 뱃속에 갇힌 상황에서 감사가 우러나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탁월함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일본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의 처지에 환멸을 느껴 전철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지만 죽지 못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손가락 세 개만 달린 오른팔을 가지고 태어난 일본 여인 다하라 요네꼬의 자전적 고백입니다. 그녀는 절망과 한숨만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절망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핑계로 수면제를 많이 모아 자살을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날 다하라 아키토시라는 신학생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도를 받은 다음 성경을 읽는 가운데 고린도후서 5:17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은 그녀는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원망하던 이전의 삶이 아니라 오른팔에 손가락이 세 개나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매일 감격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자신을 전도한 그 신학생이 청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두 딸을 가지고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산다고 하는 것은 행복하다가 아니고 황홀하다”고 하였습니다. 감사는 죽음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의미를 줍니다. 감사는 밋밋한 삶이 아니라 황홀한 삶을 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믿고 늘 감사합시다. 내가 홀로 외롭게 있지 않고 우리 주님이 가까이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이한 은혜를 헤아리고 매일매일 행복에 겨워 황홀하게 사는 감사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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