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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전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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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으로 (고전 4:14-21)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삶의 변화입니다. 

남자의 일생에는 몇 번의 큰 변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은 이 시절 자신이 부모님으로부터 심한 간섭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년이 되면 어떻게 하든 독립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총각 시절이 되어서는 규모 없는 철부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삶의 변화입니다. 홀로 사는 것에서 이제는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 나갑니다. 총각 시절이 방종이 섞인 자유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가정이라는 따뜻한 쉼의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의 기쁨과 자유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남자들은 철부지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봐도 그렇습니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저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처음 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 ‘아버지’란 말이 그렇게도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내가 아버지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내가 한 아이의 아빠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난감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저로서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것이 내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이러 이러한 아버지가 되겠다고 준비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제게는 몇 가지 단순한 바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와 함께 마음껏 뛰놀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놀아본 경험이 없던 제게 이것은 소박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원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자녀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직장에 나가야 하는 아버지들에게는 쉽게 상상이 안 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공부하는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밖에 나가면 함께 뛰고 공놀이를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고, 저 자신에게도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자율적 판단에 따라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나도록 이끌어주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자로 자라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율적이고 성숙한 인간에 대한 마음은 늘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녀들을 키워내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이자 목사인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이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는 인물이 될까 늘 묻곤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아버지상을 잘 유지하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사모하면서도, 과연 내가 아버지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 깨닫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바 아버지. 매일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역할은 대체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아버지 역할을 하셨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 때 생각난 말씀이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네 육신의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자기 몸까지 주려고 하지 않느냐? 어머니란 그런 존재다. 그런데 그런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 아들과 딸을 혹 잊을 때가 있어도 나는, 하늘에 있는 어머니, 하늘에 있는 아버지로서 결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육신의 어머니, 내 육신의 아버지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과 감사가 새삼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떠올린 것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늘 자신은 교회의 영적 아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을 보면 바울의 그런 마음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15) 

여기에서 나타난 ‘스승’이라는 말은 오늘의 ‘선생님’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전 헬라로마시대에는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하게 된 사람이 자녀를 키울 때, 그 사람을 ‘Tutor(가정교사)’라고 부르며 그를 보호자로 세워주었습니다. 그 말이 여기서 말하는 ‘스승’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몽학 선생’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그런 보호자가 아니라,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너희를 돌보는 사도”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자녀를 양육할 때 경험되어지는 통증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합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자녀들로 인한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 때문에 아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아파보지 않은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병이 들면 대신 내가 아프고 싶은 것이, 자녀가 친구들에게 소외라도 당하면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입시에서 실패라도 하면 내가 떨어지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갖고 있는 통증입니다. 자녀의 아픔을 함께 경험하는 마음 속 고통입니다. 

바울은 사실 결혼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인 아비의 마음으로 돌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나는 너희를 갖기 위해서 해산하는 고통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정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많은 아픔을 참아낸 인물이었습니다. 

가정이 최고의 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자꾸만 사나워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갈등과 이기로 분파하게 된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4:14)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근본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우리 속에는 알게 모르게 교만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을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 나는 너에게 없는 좋은 점이 있다는 자만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타락과 음란의 도시, 불모지처럼 버려져 있던 도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정성을 다하여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교회를 떠난 사이 교회 안에 시기와 갈등과 분쟁이 가득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닌 아버지의 마음이란, 첫째 안타깝게 여기며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분명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불평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잘못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마음, 애통해 하는 마음은, 그 문제와 잘못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은 교리가 아닌 복음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다. 잘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사건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식 싸움만 하고, 교리 싸움만 하고 있구나. 자기를 뽐내는 이기적인 분쟁만 일삼고 있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이고 지혜이며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뽐낼 것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면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지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쌓을수록 우리에게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인간을 끊임없이 교만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딱 그러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지식으로 스스로를 남들보다 더 낫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이러한 성숙하지 않은 모습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3:1)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 아이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커야하는데,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바울의 한탄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자녀가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었는데 그 때까지 걷지를 못하고 누워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픕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은 자녀의 발달과 성장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계속 어린 아이처럼 젖만 먹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밥도 먹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생각 좀 하라는 것입니다. 분별 좀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교만하게 되고,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보고 시기하고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같은 성도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바울이 가진 아버지의 마음 두 번째는, 성도들의 존귀함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은 낮아지고 성도들은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고린도전서 4:10)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높아지면 나는 낮아져도 좋다, 여러분이 지혜로워지면 나는 미련해도 괜찮다, 여러분이 강해지면 나는 약해도 괜찮다, 여러분이 존귀해지면 나는 비천해도 괜찮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보다 자녀들이 더 귀한 자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성도들이 지혜롭고, 능력 있고, 존귀하게 하나님 앞에서 성숙된 존재로 칭찬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이 나, 바울의 것이 아니라 나 바울이 여러분의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힘을 받아라.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 존귀한 그리스도인,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세 번째 마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가장 빨리 사라지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스스로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누구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감사가 사라진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6~7)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어찌하여 교만하며 스스로 자랑하고 있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아버지가 되면서 자녀들에게 늘 “배우면서 성숙해라. 나보다 더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평생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소망교회 담임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계속 어린 아이로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 말씀으로 더욱 성숙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붙잡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열망이 성도님들에게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평생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유명해져도, 또 교회의 어떤 직분을 맡아 봉사를 하고 있다 해도 내 영혼에서 감사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다른 것 좀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내게 주신 감사의 제목들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양을 부르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이 주신 이 자유의 축복, 은혜의 축복, 구원의 축복을 마음껏 감사하게 하시옵소서”라고 증거하고 선포하는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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