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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주도적인 사람 (갈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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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주도적인 사람 (갈 5:16-18)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면서 심한 일교차로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자연 앞에 인간이 이렇게 약합니다. 조금만 날씨가 변해도 맥을 못 추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을 이기면 건강하고, 지면 병에 걸리고 심해지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자연과의 싸움은 평생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감기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자연이 가져다주는 예기치 못한 재앙과의 싸움이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일본 대지진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해했습니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지만 결국 인간은 자연과의 계속적인 싸움에서 살아가야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싸움은 경쟁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그것입니다. 지식경쟁, 스포츠경쟁....더불어 싸워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를 놓고 한 평생을 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괴로운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행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싸움이 단순한 싸움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싸우면서 자기 진실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입니다. 그는 인간의 자연과의 싸움을 설명하면서<바다 위의 노동자>라는 책을 썼고, 인간관계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면서<'93년> 이라는 소설을 썼고, 그리고 인간의 자신과의 싸움을 극적으로 그려서 <레미제라블>이라는 훌륭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많은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는 가운데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능력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연 문제에 대해서, 경제문제에 대해서, 정치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만큼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며 사시느냐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서는 즉각적으로 원망하고, 언제나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나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솔직하게 '나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기 진실, 자기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먹고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또 하나 우리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남이 한 잘못에 대해서는 죽일 일이라고 떠들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실수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러는 한 진실 된 자신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적 위인 중에 단연은 사도바울일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특별히 롬7장에 나오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19절과 23, 24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숨김없이 부르짖었던 바울이 급기야 고전 9장 마지막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 하게한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면 올바른 자기 찾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잘 제어하고 살아가십니까? 
사람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첫째는 육체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고, 이성이 있고, 마음 가운데에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겠지만 마지막 판단을 하는 것이 어느 쪽이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성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추리할 수 있는 능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이 곧 이성입니다. 

이 이성에 이끌려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이치에 맞게 생각하려고 하고, 신사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인격을 가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은 성령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육체의 욕망도 있으나 성령의 역사에 다 굴복합니다. 이성적인 판단도 있고, 비판의 능력도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말하자면 늘 육체적인 소욕과 성령의 역사 가운에서 자신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역사를 택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제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여기에는 선택의 불가피성이 있습니다. 양자택일을 해야지 둘 다는 불가하단 말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좋고 영적으로도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 중에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둘 중에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좀 답답한 사람들을 봅니다. 

사람이란 육체적인 일에 실패를 했으면 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뭘 해도 안 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저 것 별의 별 일을 다 해봐도 지독히도  안 되고 실패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원인이 분명합니다. 인간적인 욕망만 가득 차서 가지려고 했습니다. 순전히 제 배불리기 위한 육체 주도적으로만 살았습니다. 베풀 줄도 몰랐고, 나눌 줄도 몰랐고, 봉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제 욕심만 차리다가 번번이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좀 고쳐먹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패러다임 스위치(Paradigm switch)>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규범과 전형의 틀이 있습니다. 잘 바꾸지 않는 하나의 고집처럼 지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패러다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그 패러다임으로는 계속 실패할 뿐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것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시도하는 변화로의 도전을<패러다임 스위치(Paradigm switch)>라고 합니다. 

육체로서 일을 그르쳤다면 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실패한 삶의 연속이라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 아닙니까? 불신앙으로 실패한 인생이라면 신앙으로 돌아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있고, 교회 밖에서 더 머무르려고 하고, 불신앙에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고 영원히 육체가운데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소신이 있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목적을 향해 나가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소신껏 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산다고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누가 봐도 그 고집이 현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인데도 그 어리석은 생각을 돌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일에다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부지런을 떨면서 소신이라고 고집하며 점점 더 멀리 가는 것만큼 망할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 근본적으로 돌아오는 패러다임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더 더욱이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중생하고, 예수 처음 믿고 십자가의 예수를 발견하고, 내 죄 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던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그 동안 얼마를 믿었느니, 내가 뭘 알았느니, 내가 직분을 받았느니 하는 쓸데없는 생각 다 잊어버려야합니다. 처음 구원 받아서 기뻐했던 첫사랑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정말 순수하게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렸던 그때로 돌아가는 패러다임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서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내가 하는 십일조가 어디 허탄한데 쓰이지 않을까?’가 걱정되어서 십일조를 못하고, ‘지금까지 드린 십일조만으로도 남은 신앙 생활하는데 유효하다.’식의 계산을 하거나, ‘내 스스로 판단해서 이 정도만의 십일조를 하면 내 신앙생활과 적당하게 맞다.’ 는 식으로 이해타산 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도 육체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창조적인 역사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내 생각, 내 계산 따위는 다 버리고 성령이 원하는 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 가운데 혹시 “이대로는 안 된다.” 는 스스로의 깨달음이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육체주도적인 삶을 버리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까? 이성 주도적으로 살면서 현명하다는 소리는 듣고 살지만 그리스도인 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성령주도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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