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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가시 면류관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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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하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2천 년 전의 가시 면류관이 비단 노트르담 성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유럽 전역의 성당에도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벨기에의 겐트, 독일의 아켄, 이탈리아의 로마·피사·나폴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또한 영국의 우스터 등 각 고장에 있는 성당들이 
제각각 가시 한 개 혹은 몇 개씩 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루이 9세가 면류관과 함께 가져온 성물(聖物)은 십자가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십자가라면 우선 세인트 헬레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헬레나는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로마제국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자비심이 많고 기독교 신앙이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80세의 고령에 그녀는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 1,400마일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대제로부터 성지의 성물들을 수집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A.D. 3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교회사 연구자였던 그리스인 소크라테스는 
A.D. 305년에서 439년까지의 교회사를 기록했습니다. 

그 ‘교회사’에 기록된 헬레나의 행적은 이렇습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마카리우스를 대동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골고다 언덕에 올랐습니다. 
그 언덕엔 이전 시기 로마 황제가 지은 비너스 신전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전을 부수라고 명했습니다. 
그 무너진 자리의 굴속에서 놀랍게도 세 개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박았던 못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가시면류관도 같이 발견됐다는 기록은 소크라테스의 ‘교회사’에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난처한 건 어느 게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인가 였습니다. 
행악자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난제를 해결한 사람은 마카리우스 주교였습니다. 

그는 중병에 걸린 여인을 불러왔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십자가 셋을 차례로 만지게 했습니다. 
그 중 한 십자가를 만지니 앓던 병이 깨끗이 치유된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일부와 못들을 가지고 헬레나는 A.D. 327년 로마로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을 따로 짓고 성물들을 봉헌했습니다. 
두 개의 못을 하나는 대제의 투구에 박고, 하나는 그가 타는 말의 고삐에 넣었습니다. 
전장(戰場)에서 왕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는 그 후 수백 개의 조각이 되어 유럽 전역의 성당에 나뉘어졌습니다. 

가시면류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안 1세 재위시 기록에 의하면, 
A.D. 560년경 파리주교 생 게르맹에게 가시 한 개가 건네졌다고 합니다. 
비잔틴제국의 이렌느 왕후는 A.D. 798년 신성 로마제국의 초대 왕 찰스 대제에게 
가시 몇 개를 보냈습니다. 
구혼의 선물로서였습니다. 
왕은 이걸 아켄의 한 성당에 보관케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의 세포분열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십자가와 가시면류관의 조각들은 진품 여부가 문제였습니다. 
암흑기라고도 불리는 중세를 관통하면서, 
소위 성물(聖物)들은 경건의 대상이 아니라 우상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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