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첨부 1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헐버트는 23세가 되던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 교사로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는 1884년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한 후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인이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할 수 있다고 발표하자 세계 각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조선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헌금을 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습니다.

영어선생을 보내달라는 고종황제의 요청에 따라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헐버트 선교사입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한때 조선인들의 행동에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와 미신에 물들어 있었고 관리들은 부정, 도덕적인 불감증, 놀음 등에 묻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버트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다시 돌아온 헐버트는 불쌍한 조선인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위해 죽기로 다짐했습니다.

그의 주된 사역은 배재학당 안의 삼문 출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서 선교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주제로 조선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고, 1903년에 창설된 YMCA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로 사역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는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하는 아들 대신 모든 조선인들 자신의 아들로 삼기로 했고 자신도 조선 땅에 묻히기로 결단했습니다.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며 조선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도록 권고했습니다.

이에 고종황제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비롯한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헐버트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의 각국에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습니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요청으로 황제의 친필을 들고 미국으로 향했지만 백악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그를 친한파 선교사로 단정하고 1908년 그를 추방했습니다. 추방된 그는 해외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을 도와주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는 순회강연과 신문 기고 등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루즈벨트의 조선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미국 유학생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방이 되자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헐버트의 한국 사랑을 감사하며 그를 우리나라에 초대했습니다.

1949년 8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세 번째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4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쇠약한 몸으로 한 달 넘게 배를 타고 오느라 지쳐 귀국 1주일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바라던 이 땅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 헐버트를 존경하며 나라 사랑을 배워야하겠습니다.

- 정충영 교수(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