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겨우 겨우 턱걸이로 왔습니다.

첨부 1


겨우 겨우 턱걸이로 왔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당신의  일생을  이렇게  표현했었습니다.
"님의  발끝에  치여서" 여기  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님의  발이  자기를  한걸음씩  한걸음씩  몰아서
어찌할수없이  여기까지 왔노라는  고백입니다.

축구선수가  익숙한  솜씨로  공을  몰아가면  공은 그대로
움직여지듯이  그렇게  몰려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잘 나서  여기까지 온것이 아니라는  고백이지요.

어찌  불초한  사람이  거기에  비하겠습니까만. 
저도  하루. 하루가  겨우 겨우  턱걸이한  삶이란  느낌입니다.
한번도 넉넉하게  살아본적이 없고.  사역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겨우 겨우  쩔쩔 매면서  어찌  어찌  겨우  턱걸이 하는
아슬 아슬한  심정으로  살아온  세월입니다.

돌아보면  부끄럽고. 아쉽고.  못나보이는 것 뿐입니다.
담대함도 없고. 너그러움도 없고.  유모감각도 없고.
지혜로움도  없고.  성결함은  더구나  모자라고.
맺고  끊는 맛이  희미합니다.
사랑하고  싶으나  재간이 모자라고.  표현력도  형편없고.
친근미도  없는  그런  매마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를  섬긴다는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하심이요.  성도들의  깊은  이해와
덮어줌으로  여기까지 온것입니다.

이렇게  쫓기듯이  살아온 세월이기에
하루  하루  사역과  삶이  마치  턱걸이하는  심경입니다.
겨우 겨우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  다음은  어떻게  넘어가나  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어찌하여  하루분만  만나를  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안식일 외에는  이틀분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루 하루  하나님을  앙망해야  했던것입니다.
내일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것입니다.
주셔야만  받는것입니다.

이러한  광야의  복사판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겨우 겨우  살게 하심으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앙망하게  하신 줄로  깨닫습니다.
조금만  남아 돌면  금방  게을러 지고.  자만에  빠져버립니다.
그 남아있는것을 내것인양  자랑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  그래서  병아리를  생각합니다.
"물 한모금 머금고.  하늘  하번  쳐다보는"
병아리가  우리들의  믿음의 그림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이렇게  겨우 겨우  턱걸이 함으로서
하나님품안에서  떠날수없게  된것에  대해서 감사해 집니다.
살아야 겠고.  일은  감당해야 겠기에  마지못해서라도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은  그때 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겨우 겨우  살아가는  턱걸이  인생에게
이 턱걸이마져  적당히  하면  문자그대로 
"국물"도  없다는  엄위하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두렵고  떨림이 옵니다.
끝없는  인자하심과  서릿발치는 엄위하심이  항상  같이  하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고  사역할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여유없는  삶이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자위합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글도  겨우 턱걸이로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10일  손 목사 드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