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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목회자를 위한 권면 과연 금기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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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를 위한 권면, 과연 금기(禁忌)인가?

목회자나 사역자 들에게 어떤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 생길 때면 흔히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것이니, 주의 종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 어느 대형교회의 목회세습에 반대하는 의견들을 "하나님의 종에 대한 심판"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일부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판과 권면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충언(忠言)과 비난도 분명히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개신교의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종 따로, 사람의 종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주의 종이요 또 모두가 서로를 향한 종들입니다. 그 맡은 바 일의 내용이 다를 뿐, 교회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직분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소명이요 모두 다 섬기는 청지기의 직분입니다.

큰 직분일수록 더 크게 섬기라는 것이지, 더 큰 대접, 더 큰 섬김을 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적 직분 이해의 근본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너희의 종> 곧 <평신도들의 종>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목회자의 종이 아니라, 목회자가 평신도를 위한 종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바른 자의식(自意識)입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가 서로의 직분을 존중해야 하며, 함부로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존경의 의무를 평신도 쪽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은 사제종교인 유태교나 중세카톨릭과 아무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평신도에게 잘못이 있을 때, 목회자는 마땅히 올바르게 충고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비록 평신도라 할지라도 목회자를 사랑으로 충언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도 죄와 허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한 가난한 영혼으로 설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했지만 당나귀는 보았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오히려 어린 사무엘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목회자나 사역자들은 어느 누구의 권면 앞에서도 늘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편리한 이름을 내세워 믿음의 바른 권면을 회피하거나

신앙의 정당한 충언을 "심판"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 어떤 종교적 특권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목회의 직분은 <특권의 자리>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이며, 누리고 향유(享有)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며 희생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서는 많이 찾을 것이다"(누가복음 12 : 42). 물론, 권면과 충언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거나 인격적 비난 또는 종국적인 심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내세워 교묘히 자기를 내세우려는 교만의 죄악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일부의 주장과 같이, 목회자들에게는 어떠한 권면도 할 수 없고 또 어떠한 충언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면죄부를 팔아먹은 교황 레오 10세 앞에서 루터는 마땅히 입을 다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최고성직자인 대제사장의 죄상을 가차없이 꾸짖은 베드로도 하나님의 종을 심판했다는 비난과 정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살인자요 남들보다 훨씬 나중에야 교회에 입문(入門)한 신출내기 신자인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의 절대적 지도자였던 베드로의 외식(外飾)하는 모습을 보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히 큰 소리로 베드로를 질타했습니다(갈라디아서 2 : 11∼14). 사도들의 수장(首長)인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치, 교단의 총회장이 신학교를 갖 나온 신출내기 전도사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꼴이었을 테니까요. 언감생심,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어찌 이런 불경(不敬)스런 일이 허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것을 불경이라 해서 비난하지 않았고, 성경도 이 일을 신앙의 교훈으로 분명히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더욱이, 나이 어린 바울로부터 뜻밖의 질책을 당한 대사도(大使徒) 베드로는 바울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거나 권위와 혈기(血氣)와 감정으로 그를 억누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성숙한 신앙인격이요 사도됨의 참 모범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바울보다
베드로가 더 훌륭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겸손한 대사도 베드로는 스스로를 <사도들의 수장>이 아니라 그저 <장로들 중의 하나>로 여겼을 뿐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장로된 자요 고난의 증인이라"(베드로전서 5 : 1).

--- 그는 장로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네 맡은 자들 앞에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양무리의 본이 되는 데에는, 비록 평신도의 말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권면과 충언 앞에 고요히 귀 기울일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장하는 자세를 버린, 온 양무리의 본이 되는, 목회자의 바른 신앙인격일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이 대대로 하나님의 종인데, 평신도인 너희들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종인 우리 부자(父子)의 세습을 두고 비판하느냐" --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양무리의 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하나님의 종의 마음>이 아니라, 세속적 성취의 욕망에 이끌려 주님의 교회를 부질없는 감정 싸움으로 몰아가는 <소아병적 자존심> 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사탄에게 무릎 꿇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심판하거나 저주할 수 없습니다. 종국적인 심판과 저주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도 목회자를 심판할 수 없고, 목회자도 평신도를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바른 예의를 갖추고 또 진정 공의(公義)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충언이요 권면 이라면, 믿는 형제자매들은 그 누구라도 서로에게 권면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언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권면과 저주의 심판을 구별할 줄 아는, 그래서 공의의 외침과 비난의 욕설을 혼동하지 않는, 참된 영적 친교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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