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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추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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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 - 추수 감사

                       이광호 목사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때가 왔다. 농부들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짓궂은 여름을 애타게 보낸 뒤 결실의 계절을 맞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실을 인해 즐거워하며 이제 곧 여러 교회들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된다. 더 많은 교인들은 특별히 그 한 날을 더욱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농촌의 교회들에서는 교인들이 저마다 잘 익은 갖가지 농작물들을 가져와 강단 아래 가지런히 진열하여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모습들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 도회지의 교회들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여러 형태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그 의미를 살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도시 교회들의 추수감사절의 표현은 그 실감하는 측면에서 아무래도 농촌 교회와 비길 바 못된다. 마치 그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어떤 교인들은 추수감사절의 기분을 살리기 위해 시골서 누렇게 잘 익은 무공해 호박 몇 덩이와 잘 여문 알밤 한 됫박을 가져오기도 하고, 또 다른 극성 교인들은 시장에 가서 싱싱한 배추와 사과, 감, 대추, 옥수수 등을 사 와서 교회당 한켠에 진열해 보겠지만 뭔가 억지스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올바르게 잘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농경 사회와 이미 거리가 먼 여러 도시 교회들도 추수감사절을 의미 있게 잘 보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쓴다.

 

1.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의의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뿌리는 성경에서 칠칠절, 오순절 등을 통해 그 유래를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으나 구약 시대에서 직접 유래한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의 유월절과 장막절이 오늘날 지켜지고 있지 않듯이 칠칠절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나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그리고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는 오순절을 지키는 유래가 오늘까지 있으나 추수감사절에 대해서는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신약 성경으로부터 직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현대적 형태의 추수감사절의 출발은 보통 17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진 박해를 받던 유럽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척박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들이 도착한 땅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미개척지였을 따름이다. 그곳에서 씨앗을 뿌리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후 첫 열매를 거두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그 결실의 의미는 생존에 대한 환희였을 것이다. 굳센 손놀림과 땀흘린 댓가로서의 풍성한 열매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 생명을 유지토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눈물겹도록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즉, '많이 거두어서 즐겁고 기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매를 허락하시므로 생존케 되었다'는 의미가 훨씬 진했을 것이다.

 

2.감사의 표현 방법

 

오늘의 세대에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 행위일 수 있고 교만의 극치일 수도 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돈만으로 무엇을 해결하려 한다면 불쾌한 노릇인데 감히 하나님께 그럴 수 있겠는가.

돈 봉투에다 현금을 두둑히 넣어 교회에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선의 감사 방법이라 믿어서는 안된다. 일년간 농사지은 것을 '헌물'로써 정성껏 드리면 좋겠지만 도시 생활자의 열매는 곧 돈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물질 문명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께 잘 감사하는 방법을 배워 익혀야 한다. 물질(돈)을 동원하지 않고는 도저히 '감사할 마음'을 표현할 수 없고, 그 방법이 최고라 여겨진다면 그것은 유치한 생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각 교회들에서 지나치리만큼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는 각종 아이디어들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형식이 지나치면 그 알맹이가 약화되거나 무시되기 십상이다. 프로그램의 다양화나 기발한 아이디어화를 두고 감사의 다양한 표현이라거나 감사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의 내용은 결코 과시용이 아니거니와 경쟁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참된 감사는 '겸손'을 동반한다. 만일 나의 하는 일들이 성공적이고 수확량이 풍부하다면 그렇지 못한 이웃들에게 조심스레 겸허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수확할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며 쓸쓸해 하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몫을 나눠 가질 수 있는 풍성한 마음가짐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런 이웃을 진심으로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저들 앞에 알게 모르게 으스대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또한 추수감사주일을 그럴듯한 연보나 하는 주일로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교회 역시 그날은 연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날로 여겨서는 안된다. 오늘날의 어떤 교인들 가운데는 추수감사절 날, 해야 할 연보 문제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교회 자체도 문제이거니와 그런 교인들은 추수감사절에 대한 기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곧, 돈을 벌지 못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나 청년 대학생들은 특별한 행사를 하고, 경제력이 있는 어른들은 특별 연보나 하는 날로 추수감사절을 이해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 감사하는 풍부한 영적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 방법이나 행사 프로그램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의미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변화들을 겪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나중 시대의 낭만적인 자들의 축제 무드보다는 그 처음의 절박감 속에서도 간절했던 저들의 감사하는 마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우리에게 있어서의 감사의 조건

해마다 그래왔듯이 금년에도 역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의 이산가족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상봉하여 혈육의 정을 나누는 등 진한 감동을 준 일이 있었는가 하면 수확을 앞두고 몰아친 태풍으로 많은 농가가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고 의약분업에 따른 의료계의 파업으로 인해 감수해야하는 불편과 함께 제2의 IMF가 오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한 경제 전망도 비추어 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영향을 강하게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여름 내내 땀흘리고 성실하게 일했으면서도 불어닥친 태풍으로 기대한 결실을 얻지 못했을 때의 그 안타까운 마음은 얼마나 클 것인가! 아마 추수하는 마당에서 허탈감에 빠진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또한 불안한 가운데 위축된 소비심리로 생업에 타격을 입은 교인들도 상당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많은 중소 규모의 기업가들이 경기가 좋지 않다고들 아우성인데, 이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흡족한 결실을 맺은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농작물 재배에 성공하고 사업을 원만히 하여 만족할 만한 수확량을 확보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공한 교인들에게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똑같이 감사절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금년 추수감사주일에도 각기 소속된 교회에서 자신이 성공·실패와는 무관하게 어떤 형식으로든 감사 예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형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업에 실패해서 속은 상해도 감사 찬송은 남들과 함께 따라 불러야 하는가? 혹은 성공한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을 감사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반면 실패한 자들은 억지로 참여하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추수감사절 행사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소극적이거나 그에 장단만 맞추는 형편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모든 감사의 조건은 결코 그렇지 않다. 추수감사에 대한 감사의 조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어떤 성공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감사의 조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이요, 그가 허락하신 약속과 소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해를 돌이켜 보아 좀 잘된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혹은 그와는 무관한 봉급생활자이건 동일하고 동등한 감사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잘 보낼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어야 한다. 그 감사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수고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따라서, 연보를 남보다 더 많이 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해 보려 한다든지 어떤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순서 자체를 통해 자신을 내 보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날을 통해서 어떤 그럴듯한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과시하려 해서는 더욱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와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보다 훨씬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본질적인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진실로-그야말로 진실로-감사하며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찬송을 그에게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돈이나 물질, 그리고 그 어떤 아이디어나 프로그램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다. 단지 나 자신과 우리의 인격, 곧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지 못해 상심해 있는 이웃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자기 자신의 성공·실패와는 관계없이 저들을 위로하며 그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허탈감에 빠져 있는 이웃을 바로 옆에 앉혀두고 자신의 풍성한 결실만 생각하며 마냥 즐거워하는 그런 유치한 일은 이제 삼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웃들을 잘 살피는 뜻깊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하루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조금 많이 거두었다고 해서 자만에 차 있지도 말고 조금 덜 거두었다고 해서 한숨만 쉬어 대는 어린아이 같은 교인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에 겸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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