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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덕성교회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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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를 다녀왔습니다. 골짜기가 많다는 뜻의 풍곡(豊谷)은 험산준령 심산유곡의 끝이 없는 오지입니다. 이 지역에 위치한 응봉산(998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덕풍계곡과 덕풍마을 그리고 용소골을 지나 울진의 덕구온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전문 산악인들에게는 트레킹의 명소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덕풍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아 일급수에서만 살 수 있는 산천어의 서식지입니다. 계곡 깊은 곳에 위치한 덕풍마을은 백두대간 거대한 협곡 속에 꼭꼭 숨겨 있어서 임진왜란 때부터 피난지로 알려졌으며 6·25전쟁 때도 “언제 전쟁 났었나?” 하던 곳입니다. 2년 전 삼척시에서 계곡 초입 6㎞를 개발해 차 한대 다닐 정도의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편리는 생겼으나 한편으로는 원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아직도 옛 정취가 오롯이 남아있는 마을을 지나 용소골을 향해 오르면 수심 40m의 푸르디 못해 검은 세 곳의 용소(龍沼)가 펼쳐져 있습니다. 용소골은 제1용소를 제외하고는 일반 등산객의 접근이 매우 어려운 악산(惡山)입니다.

이 지역은 70-80년대에 우리나라 최대의 아연광산을 운영하던 영풍광업의 제2연화광업소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호황기에는 많은 사람들로 지역 경제가 번성하였으나 국제 아연 값이 폭락함에 따라 결국 87년도 광산은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 모두가 떠난 풍곡은 태고의 원시림으로 돌아갔습니다. 풍곡은 제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봉화를 떠나 풍곡으로 이주하여 5년을 지냈으니 제 유년의 대부분의 기억은 그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폐광 후 사원들의 주택이며 각종 건물들이 모두 철거되어 더 이상 어릴 적 놀던 마을의 터도 찾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것이 산림으로 변해 버려 더욱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곳입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홀로 배낭을 두른 채 풍곡의 골 골을 찾아 헤매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제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타며 봄이면 참꽃 꺾어 먹고 가을이면 머루랑 다래를 따 먹던 일, 강에서 참피리며 메기를 잡던 일, 애꿎은 오리를 잡아다가 강둑에서 무자비하게 날려버리며 깔깔거리던 일, 겨울이면 비료포대 들고 언덕에서 눈썰매 타던 일, 너무 시려 떨어질 것만 같은 귀를 움켜 잡고 하루 종일 얼음판을 지쳤던 일, 또한 총무과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를 찾아 가면 공장의 이 곳 저 곳을 견학시켜 주셨습니다. 채광된 광석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채 이리 저리 옮겨지다 마지막엔 자동으로 지엠시 트럭에 적재되어 수십 대의 행렬을 이루며 제련소로 떠나 가는 광경 등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는 아름다운 덕성교회가 있습니다. 여름이면 여름성경학교 주제가인 “흰구름 뭉게 뭉게 피는 하늘에”를 부르며 모두들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술시간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기합과 더불어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 병 속의 볼펜이 저절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면 볼펜이 병 밖으로도 나올 수 있다며 다음 시간에는 더 많이 전도해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네에 믿지 않는 아이들을 모두 교회로 데려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볼펜이 제 힘으로 병 밖으로 나오는 장면에 모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예배가 끝나고 빈 예배당에 몰래 들어가 병을 찾아 보았더니 글쎄 볼펜 끄트머리에 낚시줄이 묶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성탄절 준비와 행사에 모두들 분주합니다. 어느 해 성탄절에는 제가 무슨 심통이 났던지(아마 성탄절 연극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지 못했는가 봅니다) 저녁에 모두들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예배당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괜히 신발장의 신발들만 잔뜩 엎질러 놓고는 줄행랑을 친 기억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헌금으로 장난하다가 마루 틈 사이로 빠트려 속상해 했던 일, 헌금으로 받은 백원 중에 오십원 어치 군것질 하고 오십원만 헌금하다가 수상히 여긴 선생님의 신고로 어머니에게 매 맞았던 일…

풍곡으로 이사한 던 첫날에 덕성교회는 증축 중이던 예배당이 간밤의 태풍에 무너져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다시 세우는데 온 교인들이 매달렸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과 함께 벽돌을 날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버지는 덕성교회를 열심히 섬기셨고 그곳에서 집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폐광 후에 그 많던 교인들은 모두 떠나고 광산이 개발되기 전부터 그곳에서 너와집 짓고 살았던 극소수의 주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원주민들이 자리잡고 있는 아래 동네로 옮기었고 여름이면 도회지 교회들의 수련회 장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전의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혹시 빈 예배당이 폐허로 변해버렸으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로 교회의 대문을 열었습니다. 너무도 감사하게도 낙향한 낯선 초로의 성도가 교회와 사택을 임대하여 그곳에서 생활하며 교회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니 어린 시절 그렇게도 넓어 보였던 그곳은 우리 성가대실 보다 더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아버지는 오랫동안 일어서질 못하셨습니다. 젊음을 바쳐 충성했던 교회를 20년 만에 다시 찾은 그 감회를 저는 다 알 수 없었지만 삐걱거리는 낡은 마루 바닥 이곳 저곳을 눌러보시고 강대상의 먼지를 훔쳐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뭉클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교회와 붙어 있는 사택을 살펴보시며 당시 사택 신축에 어머니 몰래 백만원 헌금을 작정하고 박봉에 큰 돈을 마련하느라 고생했다며 웃으시는 모습에 또한 은혜를 받습니다.

새로이 옮긴 교회를 방문하여 목사님을 찾아 뵌 후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저에게 식사값을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뒤에 조용히 하시는 말씀이 갖고 있던 돈은 예배당을 관리하던 분과 교회의 담임 목사님에게 모두 드리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에서 하루를 보내며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편리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너무 함부로 훼손하고 있으며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스스로 좁혀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이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저의 부모님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의 깊은 신앙은 어느 한 순간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겪어오면서 이웃과 교회와 하나님을 귀히 여기며 섬기며 살아온 날들의 축척에 다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쉽게 내 삶의 형편에 따라 편리하게 주를 섬겨온 지난날을 다시금 돌아보며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만 살아가는 변치 않는 믿음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성안교회 시온성가대회보 10월호 지휘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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