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나는 야한 남자가 좋다!

첨부 1


          
나는 야(野)한 남자가 좋다

먼저 이런 야한(?) 제목을 붙여야 世人(네티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데서 심히 비애를 느끼는 바이다. (*^.^* ㅋㅋ 나도 이런 걸 다 배웠네!) 혹자는 야릇한(?)기대를 가지고 이 곳을 클릭했을 것이고 혹자는 “왠 성인광고인고”하는 괜한 우려를 가지고 이곳을 클릭했으리라.

오래전에 성장기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어느 대학교수가 쓴 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졸지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변태적 사고를 심어준 일이 있었지 않은가? 이 글은 그 이야기와는 전혀(? 전혀는 아니겠지 제목이 비슷하니까!) 관계가 없는 글이다.

나는 야(野)한 남자가 좋다. 쉽게 말하자면 좀 야성적인 기질을 가진 남자가 좋다. 성경의 고사를 빌자면 에서와 야곱 가운데, 에서와 같은 성격의 사람이 좋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못된 녀석이었지만, 정말 그는 남자다운 자였다. 그가 신앙을 가졌더라면 참 좋았었는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그를 버려 놓은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아곱같은 녀석이기 때문에 에서같은 사람이 더욱 부럽다. 그런 멋진 성격을 가지고 신앙 좋은 이 시대의 젊은이는 없을까?

나는 스스로 효자였다고 자부한다. 말썽 한번 부려본 적 없는, 부모님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그야 말로 범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거역의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전혀 표출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것을 알았다. 나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맏아들’과 같은 자였다. 망나니 같은 동생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이중인격의 소유자. 바리새인같은 외식주의자!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맏아들보다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이 더욱 소망이 있는 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둘째아들! 그의 화려한 경험(?)이 영성에 큰 유익을 주었겠지. 후일 그는 가식이 없는 신앙인으로 성장하였으리라.

그리스도인은 동물로 말하자면 호랑이이다. 포효할 때는 온 산천이 벌벌 떠는 그 호랑이 말이다. 그러나 야성을 잃어버린, 동물원에 갇힌 범은 정말 밥맛(?)이 없다. 오늘날 교회라는 울타리 내에서만 잘난 척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나가면 주눅들어 살면서 말이다. 야성을 잃어버린 호랑이, 그게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야(野)한 남자가 좋다. 온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야(野)한 남자. 야성(野性)을 가진 남자 말이다. ‘야(野)’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처럼 아웃사이더 말이다. 그냥 죽은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이보다는 혁명 내지는 개혁을 꿈꾸는 남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로 도전하는 남자. 프론티어 정신으로 날마다, 날마다 앞을 향해 도전하는 그런 남자 같은 그리스도인이 좋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으랴! 일어서자. 잃어버린 야성을 일깨워 일어서자. 그리고 포효(咆哮)하자.



          
순천바람직한교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