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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나는 매일 10km를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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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을 본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배가 약간 나왔을 것이라고 하신다.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 정말 잘 맞추셨다.
나는 원래 태어 날 때부터 젖살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다지 뚱뚱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탐식의 버릇이 있다.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그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 정신 연령이 낮은 녀석이라
늦게 철이 들어 34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
그 때 내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두 쪽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참 신비한 손을 가지고 있어서
없는 형편에도 음식을 얼마나 맛있게 하는지
무슨 음식을 만들어도 내 입맛에 쏙 들었다.
그 때문인지
결혼이후 내 몸무게는 날로 늘어나는 것이었다.
내 키는 170cm, 결혼 때 62kg이었는데
몇 년 안가 85kg이 되었다.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부교역자 4년의 사역을 마치는 때에는
만성 편두통에 시달려야 했고
항상 온 몸이 피곤하여 몸을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다.
병원을 찾았더니 스트레스성 편투통과 지방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부교역자 4년간은 참으로 힘든 기간이었다.
담임목사님이나 장로님, 모든 성도님들이
다 좋으신 분들이었지만
부목사라는 직책 자체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전에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단독목회를 했기 때문에
항상 설교를 했던 사람으로
부목사로 가니 처음에는 설교 강단에 한번 오르지 못하는
고통이 쉽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째 되던 해 담임 목사님이 갑자기 병이 나셨다.
그 때문에 목사님이 병원에 계시는 동안 강단을 맡아야 했고
퇴원하신 이후에는 갑자기 설교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때에는 주일 오전 10시에야 목사님이 설교를 못하신다는
통보를 받고 내가 강단에 올라야 했다.
설교 준비를 평상시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설교 준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갑자기 설교를 해야 하는 때에는 적잖은 스트레스가 되었다.

4년째가 되었을 때, 1999년 1월 1일 매일 같이 심방을 하던
여전도사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충격이어서
나는 사흘 동안이나 잠 한숨을 이룰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내가 정말 한탄한 것은
교인들이 전도사님을 애도하면서도
장례를 치르면서 한편에서는 농담하고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하여 잊혀져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후 얼마나 안 되어 담임목사님이 갑자기 은퇴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1년 정도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의 부목사로 강단을 맡아야 했다.
심방은 매일 15가정을 해야 했고
또 권위가 서지 않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해야 했다.
교회에는 개인적으로 나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고
내 설교에 은혜를 받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내 자신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져만 갔다.
부목사로 겪을 수 있는 것들은 다 겪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부목사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성도님들은 잘 몰랐겠지만
그 때 나는 상당한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는 담임목사님을 새로이 모셨다.
나는 이미 예고한대로 그대로 교회를 사임했다.
교회에서 내게 내 놓은 대안은 그대로
그 교회의 부목사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정서상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나는 그게 그저 의례적인 말이려니 생각했다.
교회에서는 내가 아무리 못난이라고 해도
나를 좋아하는 성도님들이 있고
새로 목사님을 모시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 전부터 나는 작은 시골교회가 있으면 가서
노인들을 섬기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목회자 과잉의 시대에 그런 목회 자리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 대책도 없이 교회를 사임해 버렸다.
그 때가 1999년 12월이다.
당시 교회에서는 부목사 한달 사례비가 80만원이었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들이 잘 사는 줄 안다)
4년 사역으로 계산하여 320만원의 퇴직금을 주었다.

겨울은 닥쳐오고
아내는 11월 7일에 넷째를 낳았기 때문에
몸도 아직 다 풀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아내는 막무가내 남편을 따라 올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로 빈집에서 무료로 살 수 있었고
가장 따뜻한 겨울을 지냈다.
(그 전에 우리가 있던 집은 전부 겨울에 얼마나 추운 집이었던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보내려고 훈련하시나?’ 했었다.)
그 320만원은 봄이 되도록 몇 달 임지 없이 지내는 동안 다 써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우리에게 개척의 길을 열어 주셨다.
시골에서 목회하고 싶었지만
비굴하게 타협하고 말았다.
시골 목회를 해 보았기에 사람이 적은 시골에서
개척을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은혜 중 이렇게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를 개척했지만 전투적이지 못한 나의 성격 때문에
정말 쉽지 않았다.
그것도 건강이 좋지 않아 하루 종일 누워있고만 싶었다.
종일 누워 있어도 피로는 풀리지 않았다.

개척을 하면서 건강을 위해 봉화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다니다 보니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몇 달 해보다가 좀더 효과적이며
시간이 적게 들고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을 찾다 보니
조깅이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뛰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정말 부족한 것이 잠이었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12시 이전에는 쉽게 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 하루 4시간 20분만 자고 운동하고 하루 일과를 행한다는 것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뜬하다.
처음 뛰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500m를 뛰고는 주저앉고 말았다.
겨우 2.5km를 뛰고 2.5km를 걸었다.
근육통 때문에 다음 날은 걷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절뚝거리며 뛰고 걸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10km를 한시간 정도에 뛴다.

그렇다고 지금 그것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날마다 나는 내 자신과 싸운다.
아침마다 정말 뛰기 싫다.
그리고 2~3km까지는 정말 힘들다.
날마다 ‘오늘은 조금만 뛰다 와야지’하지만 항상 다 뛰고 온다.
도착할 때는 ‘이거 20km도 거뜬히 뛰겠군!’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오늘은 비가 왔으면....’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름에 한 20여일 정도 비가 계속 내려서
뛰지를 못하다가 다시 뛰면서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전에 10km를 뛰었던 경험이 있어서 중간에 돌아온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그 거리를 다 뛰면서 정말 힘들었다.

지금도 뛸 수 있어서 뛰는 것이 아니다.
항상 뛸 수 없는데 이를 악물고 오기로 버티며 뛴다.
뛸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내와 지구력으로 뛴다.
그러다 보니 몸무게도 많이 줄고
목둘레와 허리도 줄었다.
이제는 하루, 하루 맑은 정신으로 산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 말씀이 가슴으로 다가 왔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이렇게 길게 쓰려는 것이 아닌디 되게 길어져 버렸네잉......
문장이 엉망인 것 같네요....


순천바람직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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