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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손양원 목사님의 10가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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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묘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 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 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긴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부등켜안고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 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 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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