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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등골 이야기 3 - 진짜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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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이 곳을 일컬어 섬이라고 합디다만
   육지가 섬이 되고 섬이 육지되는 이치
   그 이치 깨닫고 나니 예가 바로 에덴입니다.

   인생 고개 이제 반 넘어 숨이 턱에 와 닿지만
   옷고름 되여미고 한바다로 향합니다.
   사는 일 목은 말라도 눈부신 하루입니다.

   언제나 수평선은 보람으로 넉넉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본향 찾아 가는 오늘
   하늘로 가는 길들이 만파(萬波) 속에 열립니다.
      
                                졸시「소안도에서」전문

          
  이른 아침, 바다로 난 창을 열면 제주도가 숨바꼭질하는 아이의 뒷모습처럼 잡힐 듯이 다가서는 소안도 진산리 바닷가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헌다요. 이 동네 안 믿는 사람들도 이 종소리 듣고들 일어난디라우…."
  혹시 종소리 때문에 불편해하는 마을 사람이 없는지 묻는 나에게 김일용 집사님은 하회탈처럼 웃으며 말했습니다.

  부임한 후, 나는 종 치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여보, 오늘 종소리 어땠소?"
  "……"
  아내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때마다, 나는 쥐 뜯어 먹은 듯한 종소리를 낸 것에 대한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실 새벽 세시 반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단지 줄을 통해 느껴지는 종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사나흘이 지나도록 종소리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이웃들이었습니다.
  '종소리가 좀 이상해졌어요. 전에 듣던 소리하고 다르네요. 종에 금이라도 갔나요?'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어느날, 나는 김 집사님에게 넌즈시 말을 건넸습니다.
  "집사님, 종 치는 일이 쉽지 않네요."
  "아먼이라우. 저는 이 교회 생기고 나서 지금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종을 쳤지만 한 번도 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구만요.…말 타는 사람이 말과 하나가 되어야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종을 치는 일도 우리 몸이 종과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제 소리를 낼 수 있지라우."  

  종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을 말하는 집사님의 얼굴에는 어느새 기쁨과 함께 자신감이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며칠전부터 어두워 보이던 안색이 금새 밝아졌습니다.
  그동안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생각해온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집사님에게서 종 치는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집사님, 저는 종 치는 데 별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집사님이 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집사님은 하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종을 뭔 소질 갖고 친다요? 치다보면 좋아지지라우.…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허신게 종은 내가 칠랍니다…내가 교회에서 할 일이 뭐 있어야지라우. 나한데는 종 치는 일이 예배나 진배 없지라우."

  나는 문득 빅터 프랭클의 예화 중 '난장이'가 떠올랐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물구나무 서서 발로 공 굴리는 재주를 가진 난장이가 추운 공원에서 떨고 있는 것을 본 한 수도사가 수도원으로 데려가서 옷과 음식, 잠자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장이는 날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만 갑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수도사는 어느날 이른 새벽, 텅 빈 예배당에서 홀로 물구나무 서서 공 굴리기를 하는 난장이를 발견합니다.
  난장이는 공을 굴리면서 계속 중얼거립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공 굴리는 재주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라도 저를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 때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굴리는 난장이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야말로 나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었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은 난장이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는 이야기 입니다.

  김 집사님에게 있어서 종을 치는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 즉 예배였던 것입니다. 올해 일흔다섯일 집사님은 남들이 대소롭지 않게 여기는 종 치는 일 속에서 남 모르는 기쁨을 찾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진산리 사람들은 다시 맑은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곳을 떠나온 지 어언 4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나는 압니다.
  오늘도 종종걸음치는 병아리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개나리와 빠알간 정겨움을 더하는 파리똥나무가 사철나무와 뒤섞힌 울타리 옆에 서 있는 종탑 아래, 이제막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울려대는 집사님의 종소리에 남쪽 하늘이 한뼘씩 높아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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