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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만날 때와 헤어질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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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서 대신 송인규 목사님이 1985년에 쓰신 소책자 <만날 때와 헤어질 때> (ivp)에 나와 있는 부분을 6쪽부터 21쪽까지 재 나름대로 요약해서 인용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헤어져야 할 때가 있다.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이러하다.

첫째, 가장 흔한 예는 서로가 (아니면 어느 한 쪽이) 결혼이나 결혼의 가능성을 확실히 고려하지 않은 채 만나다가, 어느 결단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불가불 행동을 취하되 부정적 방향으로 기울은 경우이다.

둘째, 처음부터 불리한 여건(성격이나 기질의 큰 마찰, 지적 수용성과 교육의 정도차이, 가족이나 부모의 반대, 종교적 신념의 유무 등)을 안고 시작한 교제였는데, "지금은 문제가 있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서로 사랑하는데 뭘..."하는 막연한 낙관적 태도가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하고 끝내는 곪아 터지고 마는 경우이다.

셋째, 사귀는 도중 자신이나 상대방의 조건에 변화가 생기고 이성관, 현실관, 가치관 등에 현격한 변동이 찾아 옴으로 인해 해묵은 교제를 청산하는 경우이다.

넷째, 상대방에게서 문란한 이성교제나 부정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교제를 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타당한 일이다.

일단 헤어지고 나면 그 직후에는 잘 모르지만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허감과 형용키 힘든 고뇌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이 때에 생기는 최대의 위험은 과거에 연연하여 현실을 도피하고 미래를 포기하려는 정서적 자살행위이다. 즉 지난 날의 즐거웠던 추억들, 애틋한 그리움, 기약 없는 회복에의 동경 등에 정신을 빼앗긴 채 비탄과 자포자기 심리, 그리고 자학적 감상주의에 휩싸여 부질 없이 세월만 흘려 보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위험을 잘 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과거집착증과 병행하여 겪는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헤어짐에 대한 반발로 인하여 상대방을 증오하거나 헤어짐을 유발시킨 상대방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에 대해 깊은 적대감과 원망을 품는 일이다. 이것은 헤어짐에 있어서 크게 자존심을 상한 쪽일수록(대개 "채였다"는 말로 이해되는) 더욱 그러한데 만일 여성 쪽에서 배척을 당했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것이든 억압된 원망을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표출시키는 일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해독이 될 뿐이다.

또 하나의 아픔은 이미 교제하는 것을 알고 있던 주위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 겪게 되는 심한 쑥스러움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일에 대해 궁금증을 표시하며 알고 싶어할 뿐 아니라 호기심이 동반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뜨며 "왜?"라고 의아해 한다. 인간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어서 주위 사람들은 겉으로의 위로적 태도와는 달리 속으로 "잘 됐다." "그 동안 너무 티내고 다니더니 하나님이 치셨다." "고소하다." 등의 정죄하는 마음을 품기가 쉽다. 특히 헤어지기 전에 양가의 부모와 식구들에게 소개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또 다른 어려움은 헤어진 대상과 같은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알려진 비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모임 가운데서는 다른 대상과 이성교제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포함된다.

또 한가지 지적할 수 있는 어려움은 지금까지 사귀던 이에게 맞추어 인생을 설계하고 꿈꾸던 것을 백지화하고 근본적인 재조정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자의 경우 심각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늘 구해왔던 그리스도인일수록 헤어짐 때문에 받는 충격은 크다 하겠다. 특히 처음 출발할 때는 굳게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감사하며 지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러면 과거 몇 달 혹은 몇 년 간의 사귐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반역과 쓴뿌리의 시기였단 말인가? 하고 회의와 의심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귄 일 모두가 하나님의 뜻 밖에 있었다든가 이제 자신을 향한 최선의 삶은 막히고 말았다든가 하며 비극적 견해만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교제의 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각자를 훈련시키셨으며 더 성숙한 개인들로 키워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영원한 실패와 영원한 좌절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 보람있는 인생의 길을 밟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픔과 고뇌는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상처는 아무는 법이며 곧 새살이 돋아난다. 더 이상 상실의 논리로 인해 떠오르는 태양마저 놓치도록 하지는 말자.

우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 가운데 있음을 믿고, 알고, 고백하고 살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필요하다. (전3:1,3,4,6,11)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말고 전혀 새로운 마음의 재출발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 이미 어떤 일을 다시금 시작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대에 가득찬 나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어려움과 미묘한 감정 변화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기도해 줄 수 있는 동성의 친구나 선배 혹은 조언자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고통을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이 사실이나(잠14:10) 먼저 생애를 산 성숙한 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마음 통하는 친구에게 흉금을 터 놓는 일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익하고 건설적인 결과를 낳는다.

셋째, 사귐이 중단된 이후에 생기는 시간의 공백을 여러가지 건전한 계획으로 채워야 한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공부, 스포츠, 취미 활동, 기술 습득, 사회 봉사 등)에 몰두함으로써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넷째, 헤어진 대상과 우연히든 신앙 활동 때문이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록 모임 안에서라도 자연스러워야 하고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형제 자매인 것이다. 억지로 눈길을 피하려 들거나 역력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거나 부자연스러운 냉정함을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제거되어야 한다. 과거에 만났다 헤어진 것을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담없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후속조치는 헤어진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던 모임(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그 두 사람이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면 그 중요성은 배가된다. 공동체 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주며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이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치유 받고 다시금 건전한 관계로 회복될 때까지 돕는 일은 바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책임인 것이다.

여섯째, 이성교제가 도중하차해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이성교제 자체나 이성의 대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아는 여러 사람의 눈총 때문에 짐짓 부정적 태도를 엿보이려고 하는 것까지도 건강한 일은 못 된다. 고뇌와 아픔을 동반하되 이성을 사귀고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선물을 잘못 사용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선물 자체까지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경험을 지나면서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지혜롭게 될지언정 하나님이 "좋다" 하신 것을 인간이 "좋지 않다"고 선언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하나님의 자녀에겐 만나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신기하고 놀랍다. 어차피 헤어져야 한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은 무한히 풍성하며 영원까지 이어진다. 이성과 사귈 때 또 원하지 않지만 헤어져야 할 때 이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이성과 사귈 수 있는 충분한 적격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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