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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예배는 하나님께, 마음은 콩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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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하나님께, 마음은 콩밭에

7,80년대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할 때 비록 공무이었기는 하나
나에게는 공산 사회주의 국가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잔뜩 겁을 먹고 공항에 내린 우리일행을 더욱 섬뜩하게 한 것은
거리에 나붙은 붉은 글씨의 각종 구호와 혁명 영웅의 초상화나 동상들이었다.

아직도 사회주의 체제를 고집하는 몇 안 되는 나라에서는 여전하다.
가끔 TV화면을 통해 볼 수 있는 쿠바 하바나 시내 광장에 내걸린 중남미 혁명영웅
‘체 게바라'의 초상화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자연을 시뻘건 구호로 망가트린 북한의 산하(山河)는 어떻게 복원할지 걱정이다.
이것은 국가나 민족간의 문화적 차이가 아니다.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기법이다.

남의 이야기를 할 계제가 아니다.
북한과의 대치상황 가운데서,
또 군사정권 하에서 우리도 이런 각종 구호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우리의 맹세”라는 구호를 책 뒷면에 박아 넣지 않고서는
만화책 한 권도 펴낼 수 없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태극기가 오르내릴 때면
전국토가 “국기에 대한 맹세”로 쩌렁쩌렁 울렸다.
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얼마나 곤혹을 치렀던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회는 민주화되고 성숙해지면서 이 모든 일들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묻어버렸는데
교회만은 이런 추세를 거슬러 치닫고 있다.
예배당 안은 각종 표어, 목표, 목회방침, 신앙생활지침 등으로
어지럽게 뒤덮여 가고 있다.

개혁교회의 마지막 상징으로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십자가마저 스크린 뒤로
사라진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아니면 한쪽 구석으로 내몰아 처량하게 매달아 놓은 교회도 적잖다.
예배에 도움만 된다면 이런 변화쯤이야 어떠랴 싶지만
이것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교인들에게 비전(Vision)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것이 목회자들의 변이다.
비전 없는 교회는 당장 도태되고 말 것 같은 긴박감마저 감돈다.
교회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 비전이란 단어 가운데
혹여 성장지상주의를 꿈꾸는 목회자의 욕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성장을 갈구하는 목회자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내 뜻을 이렇게 세웠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따라와 주십사 하는 인간적이 절규를 듣는 듯 하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사도신경은 출처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형식적으로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공 예배에서 담임 목회자가 제정한 ‘신앙생활지침’이란 것을 소리 높여 복창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 집 사람은 지하철만 타면 눈을 감는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라고 한다.
눈길이 가는 곳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눈길은 목회자가 추구하는 성장의 콩밭으로 내몰리고 있다.

성도들의 마음을 묶는 것은 이런 비전, 꿈, 전략, 지침, 목표, 표어가 아니다.
목회자와 우리 모두의 실천적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02.11.30)

<글쓴이 / 심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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