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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회사원과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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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아래의 내 동생은 현직 대학교수이자 요즘 잘 나가는 전자공학박사이다. 그리고 그 형인 나는 우리나라 대기업 중에 하나인 개인회사의 중간관리자이다.
내가 시멘트 바닥에서 족구를 하는동안 동생은 필드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내가 땀 흘리려 산에 오를 때 그는 자연을 즐기려 산에 오른다. 산 오르는게 내게는 땀이 목적이지만 그는 부산물인 것이다.

어려서 똑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형제가 어쩌면 이렇게 가는 길도 다르고 노는 것도 다르며,또 사회적인 지위조차 다른 것일까? 적어도 나도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보다나은 생활과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 만큼은 부족하지 않했는데...

결코 이것이 그가 가진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동생은 그가 가진 꿈을 이루었고,나는 이루지 못했다는 것...그것이 아쉬운 것이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섬 마을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우리 동네은 섬이라는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산으로 뒤덮혀 있었다. 앞,뒤,옆의 그 산들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동네 아이들을 유혹했다.보리고개라는 말이 유행했던 그 시절,그래서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 먹거나,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나,칡 뿌리를 파 먹었다. 가끔씩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그것이 하나의 놀이이기도 했다.

짚 앞 길 건너편에 있었던 우리집 저수지는 미꾸라지,붕어,피래미 같은 물고기가 참 많았다. 가뭄이 들어 물을 퍼내면 바닥의 뻘 속에는 장어와 미꾸라지가 발에 밟힐 정도였다. 한 여름 그 저수지에서 더위를 시키려 동네 아이들과 물 장난을 하다 해가 저물어 집에 들어오면 시꺼먼 거머리들이 등이나 옆구리에서 피를 얼마나 먹었는지 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 떨어져 나왔고 동생과 나는 서로의 몸에 거머리가 붙어 있는지 확인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뒷 산을 넘어서면 바다가 있었다. 물이 빠지면 동네 여자들은 갯뻘에 몰려와서 조개나 바닷게,낚지 같은 것을 잡아 반찬으로 쓰곤 했다. 그러나 우리집은 여자가 없었다. 다섯이나 되는 누나들 중 세 분은 결혼을 했었고,넷째는 직장,다섯째는 학교에 다니느라 도시에 가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안은 그래서 어머니가 모든 일을 다 하셨는데 결코 두 아들에게 일을 시킨 적은 없으셨다. 다른 집 부모들은 일손이 부족하면 수업중인 학교에 까지 찾아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지만 어머니는 아니였다. 그래서 방학이나 토요일,일요일은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며 지냈고,겨울이면 얼음이나 눈 썰매를 신나게 타고 다녔다. 해수욕을 하는 날이면 바닷물에 절여진 몸을 모래밭에 나뒹굴며 물기를 닦아냈다. 미세한 모래는 아무리 털어도 물로 씻기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데 그대로 잠을 잤고 다음날 또 바닷가에서 나 뒹굴었다.

어머님이 일을 시키지 않은건 공부 때문이었는데 두 아들은 공부를 않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동생이 3학년이 되던 해에 드디어 어머님은 도시로 전학을 보냈다. 나는 큰 누나집에서,동생은 셋째 누나집에서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시골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머님은 두 아들의 교육만을 위해서 도시로 나왔다. 손자같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장남이었다.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머님의 일 하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시장으로 나가시는 어머님이 눈에 보였고 납부금 마감일 아침에 친척집의 대문을 두드리시는 어머님을 보았다. 그것이 동생의 눈에도 보였는지는 모른다. 이미 그때 내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것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님의 자존심을 지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의 목적을 잃어 버리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대학이라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군대에 빨리 다녀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그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3학년 2학기에는 학교의 배려로 취직을 했다. 나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현실과 싸워 이겨야 하는 삶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군대를 갔다. 지원한 것이다. 그 삶의 현장은 점점 더 나를 전투적인 인간으로 성장시켰을 뿐,삶의 의미도 기쁨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삶의 피난처를 찾아 군대로 떠난 것이다.

그렇게 군대에 가 있는동안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동생이 대학에 간 것이다. 당연히 내 뒤를 따라 사회 생활을 할 줄 알았던 동생이었다. 한 순간 배신감이 찾아 들었다. 누구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했단 말인가? 그러나 곧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터 기쁨이 밀려 들었다. 어머님이 고생하시겠지만 어떻게 하든지 동생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대학에 가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어느날 휴가를 와서 학교에 다니는 동생 모습을 보고는 정말 부러웠다. 지금도 그날의 느낌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원했다면 얼마든지 저럴 수 있었던 것을...동생은 대학에 다니면서 군대까지 면제를 받게 된다.

나는 제대를 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가까운 친척의 도움으로...그분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현역 장성으로 어머님 큰 오빠의 아들이었다. 참 좋은 회사였다. 그 당시 공무원이 받았던 급여의 두 배에 가까운 급여와 사원들의 복지 후생이 잘 되어 있는 그런 회사였다. 나는 급여의 70%를 저축했다. 나머지는 생활비와 책값,그리고 사진촬영비였다. 독신자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갈 곳도 없는 내게 책읽고 글쓰는 것과,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사진찍는게 유일한 취미였던 것이다.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부는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원엘 진학한 것이다. 내가 저축한 급여의 일부는 동생의 학비로 사용되어야 했다. 그것이 또한 기쁨이었다. 조금도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나는 결혼을 했다. 가족이 생기면서 직장생활이란 내게 있어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닌 나의 삶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서 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비록 어려서 동생과 함께 꾸었던 그 꿈은 아니였지만,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스물 여덟이 되던 해에 대학을 가게 되었고 무려 6년 뒤인 서른 넷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은 내 인생에 황금기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실컷 할 수 있었고 직장생활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사회생활이라고 하는것이 나 혼자가 아닌 함께 가야하는 것 임을 알게 한 것이다. 또한 도전과 시련,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느끼는 성취감과 기쁨은 메마른 나의 삶에 풍요로움과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비로서 주변을 뒤돌아 보게되고 세상을 향해 한숨쉬였던 아쉬움까지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때 겪었던 내 삶의 순간들이 아름답고 순수하게 기억되는건 꿈을 이루려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동생은 내가 학사학위를 받던 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교사생활을 접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관리자 임용시험을 보게 되는데 무려 3번이나 떨어지고 난 4번째 만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 회사의 대졸 신입사원 경쟁율은 25~30:1이었다. 내 나이 36세 때의 일이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 비해서는 8년이 늦어졌고 동생에 비하면 10년도 더 늦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순간도 잔꾀를 부리거나 소홀히 하지 않했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좋아질 것인지를 언제나 생각하며 노력해 왔던 것이다. 나의 상사는 그것을 높히 평가하며<너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 그 상사들은 회사의 중역이 되셨고 나에 대한 신뢰는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나를 이 회사에 취직시켜 주신 외사촌 형님의 신뢰도 변함이 없다.

우리집은 유전적으로 흰머리가 많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양쪽 귀 옆으로 하얗게 변해가는 흰머리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거의 매일을 작업복을 입어야 하는 회사에서 그 흰머리는 작업복과 그렇게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염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생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나보다 흰머리가 두 배는 더 많다. 그런데 그 흰머리가 그렇게 멋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양복을 곱게 차려입어도 동생같은 자세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동생에게 <너는 염색도 안하냐?> 하고 시비(?)를 건다. 그러면 동생은 이렇게 말을 한다. <모르시는 말씀,형님의 흰머리와 내 흰머리는 조금 다릅니다. 형님은 순전히 유전적인 탓이지만 저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염색을 합니까?> 이러면서 오히려 나를 더 약 올리는 것이다.

<노력의 결과...> 그렇다...그는 내가 노력했던 그 이상의 노력을 했고 그 힘은 그가 가졌던 꿈을 이루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나의 눈에만 보이는줄 알았던 어머님의 고생하시는 모습을 그도 보았고,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도전과 시련과 극복의 과정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에너지를 현실에 있는 어려움의 극복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써버린 반면,그는 그 어려움을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 중에 하나로 보고 그 꿈에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한 것이다.

나의 꿈이 큰 것은 아니였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되는 것...그것이었다.어쩌면 지금의 생활이 교사보다도 더 넓은 세상을 보고,더 많은 삶을 경험하며,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커 가는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꿈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작은 아빠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생은 방학이 되면 더 바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컴퓨터이기 때문에 방학을 이용해 새로이 변화하는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골프하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겪는 스트레스는 시멘트 바닥에서 족구를 하는 것으로도 해소가 되지만 그는 골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댓가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는 <나>라는 그릇의 크기에 딱 맞는 것이다. 얼마나 공평한 세상인가?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가지...
그것은 동생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열정과 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게끔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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